강태식 소설 <101화>
물론 내 생각이 틀렸는지도 몰라. 공갈협박의 대가가 아니더라도 귀하라는 말은 사용할 수 있는 거니까. 연하장이나 초대장 같은 걸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르지. 아니면 말투가 독특한 가풍에서 성장한 사람이거나. 그런 사람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어. 이미 메가톤 급 핵폭탄은 폭발했고, 내 머릿속에서는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핵 폭풍이 밀려오고, 핵 진이 눈처럼 날리고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고. 깊은 절망과 어마어마한 공포가 세상을 뒤덮고 있었어. 모든 게 불안하고 위태롭기만 했지. 저기 저 빌딩이 무너져 내리면? 도로 위에 매달려 있는 저 신호등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이런 생각을 하니까 정말 빌딩이 흔들리는 것 같고, 신호등이 뚝 떨어져서 아래 있는 차들을 뭉개버릴 것 같더라고. 모든 게 다 이렇게 보이기 시작하는 거야. 멀쩡하고 튼튼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어. 쌩쌩, 도로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을 봐도 그래. 저렇게 달리다 핸들 한번 잘못 틀면 인도에 있는 사람들을 덮치는 것도 한순간이잖아.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게 마치 한 그루의 사시나무가 된 기분이더만. 나중에는 꼬박꼬박 신호 지키면서 안전 운전하는 자동차들이 전부 나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것 같더라고. 너무 무서워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도 다른 사람들은 잘만 걸어 다니는 거야. 조잘조잘 이야기도 하고, 엠피스리로 음악도 듣고, 툭툭 장난도 치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이야. 저게 안 보이나? 저 공포가? 휘청거리는 빌딩과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신호등과 핸들 한번 잘못 틀면 살인무기로 변신하는 저 자동차들이? 여기는 장님들만 모여 사는 나라야? 두 눈 똑바로 박힌 건 나 혼자뿐이냐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 웃고 떠들면서 천연덕스럽게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말이야. 모두 미친 것 같았지. 나만 빼고.
문을 걸어 잠그고 지하 벙커에 짱 박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어. 텔레비전, 냉장고, 싱크대 할 것 없이 전부 깨지고 부서지고 떨어질 것 같은 거야. 불이 나면 어쩌지? 생각하니까 잠도 안 와. 물이 차올라서 익사할까 봐 항상 불안불안하더라고. 보면 알겠지만 이 건물이 오래됐잖아. 언제 무너질지 어떻게 알아. 아무튼 위로가 되는 건 알코올뿐이더라고. 죽어라고 마셔댔어. 해롱해롱 취해서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말이야.
그렇게 한 보름쯤 지났나? 눈을 떠보니까 몸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거야.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어. 그런데 꼬집어보니까 아파. 그건 꿈이 아니었어. 그래서 이게 혹시 말로만 듣던 유체이탈인가? 생각했지. 하지만 유체이탈이면 말이야, 방바닥에 누워 있는 몸이 보여야 하는 거거든. 그런데 그게 안 보이는 거야. 더럽고 냄새나는 이불과 줘도 안 가져갈 살림살이들뿐이야. 그때 알았어. 그게 유체이탈이 아니라는 걸. 공중에 붕 떠 있는 게 유체를 빠져나온 영혼이 아니라 체중을 잃어버린 몸이라는 걸 말이야.
일명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다. 죽음, 생명의 위협, 기타 치명적인 신체 손상을 유발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겪게 되는 심각한 정신장애다. 도전자의 살인 펀치 한 방에 쓰러진 챔피언이 다시는 사각의 링 위에 서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 때문이다. 어쩌면 퇴물이 된 비운의 챔피언, 그게 구둣주걱 아저씨의 현재 모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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