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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가드를 올려라>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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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108화>
통장의 잔고를 확인할 때마다 한숨만 나온다. 밤도 아닌데 눈앞이 캄캄해지고, 붕대를 감은 것도 아닌데 가슴이 답답해진다. 은행에서 현금 서비스를 받은 돈도 이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대출 같은 건 꿈도 못 꾼다. 어쩌면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사채를 끌어다 써야 할지도 모른다. 사채는 이자가 장난이 아니라던데……. 원금으로 이자를 땜빵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도 생활비는 꼬박꼬박 나간다. 그렇게 야금야금 쓰다 보면 그 돈도 언젠가는 바닥이 나겠지. 독촉을 받아도 갚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나중에는 어깨들이 동원될 것이다. 협박과 공갈이 날아오고 상환을 독촉하는 과정에서 폭력이 사용될 가능성도 크다. 개나 고양이의 사체 같은 걸 문 앞에 갖다 놓지는 않을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갚을 돈이 없다. 어쩌면 장기를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 서울 외곽에 있는 창고 같은 곳에 끌려가서 무면허 돌팔이 의사에게 수술을 받는다. 시설도 열악하고 환경도 비위생적이다. 그런 곳에서 수술을 받으면 죽을 수도 있다. 시체는 어떻게 처리될까? 깊은 산속에 구덩이를 파서 아무도 모르게 묻어버릴까? 아니면 모래주머니 같은 걸 매달아서 바닷속 깊이 던져버리려나? 어, 이 녀석 마침 좋은 걸 발목에 차고 있었네, 식칼 아줌마의 모래주머니가 악당들의 손에 들어가 이런 식으로 악용될지도 모른다……. 요즘은 이렇게 암담하고 끔찍한 악몽에 매일 밤 시달린다.
그래도 한동안은 정말 열심히 이력서를 돌리면서 몸부림쳤다. 하지만 오라는 회사는 한 군데도 없었다. 이번에도 기대치를 낮췄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면접 한번 보지 못했다. 하긴 나라 전체가 실업자들의 집합소다. 한 사람의 어엿한 실업자를 양산해내는 등용문이다. 능력 있고 학벌 좋은 사람들도 집에서 방바닥이나 긁고 있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능력도 없고 학벌도 없는 이 몸이 취업에 성공한다면 그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갔다가 다시 그 구멍으로 빠져나오는 왕복 패키지용 기적이 일어나는 것과 맞먹는 일이다. 그래서 취업 자체를 포기한 상태다.
이제 남은 희망은 바이브레이터뿐이다. 바이브레이터를 팔면 생활비를 해결할 수 있다. 구둣주걱 아저씨 쪽에서는 소식이 없다. 결국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안방 문을 연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바이브레이터 상자들이 보인다. 저걸 팔 수 있을까? 솔직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두 주먹 불끈 쥐고 넌 할 수 있어, 용기를 내본다. 세일즈의 생명은 뭐니 뭐니 해도 자신감이다.
우선 바이브레이터 몇 개를 챙겨서 무작정 집을 나섰다. 날씨가 좋았다. 중간에 한번 쉬고 두 시간 동안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역시 만 원이면 적당한 가격 같았다. 하지만 어디서 팔지? 어떻게 팔면 좋을까? 머리가 복잡했다. 아무리 걸어도 마음은 차분해지지 않았다.
일단은 판매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사람이 없으면 물건을 팔 수가 없다. 그렇다고 사람이 너무 많아도 곤란했다. 적당한 장소를 찾기 위해 두 시간 동안이나 걸었다. 대로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반면 주택가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파트 단지에도 들어가봤지만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는 아이들뿐이었다. 잡상인처럼 초인종을 누를 용기도 없어서 발길을 돌렸다.
개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 개라도 파는 걸 목표로 삼았다. 두 개, 세 개는 그다음 문제였다. 개시를 하고 나면 요령도 생기고 자신감도 붙지 않을까?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 계란을 투입한 고급 라면 안주에 소주 한잔을 기울이면서 하루의 피로를 푸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유흥가 뒷골목이었다.
번화가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왠지 센터에서 저만치 밀려난 듯한, 한물간 느낌의 유흥가였다. 사방에는 취객들이 토해낸 오물이 지뢰밭처럼 깔려 있고, 묘하게 톡 쏘는 듯한 악취와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스모그처럼 무겁게 내려앉아 있는 그런 곳이었다. 길 양옆에는 술도 팔고 안주도 팔고 몸까지 끼워 파는, 술집도 아니고 매춘업소도 아닌 이상한 형태의 유흥업소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학궁’이나 ‘백합’처럼 고풍스러운 간판이 있는가 하면, ‘로즈’나 ‘노스탤지어’처럼 이국적인 상호들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외관은 대개 비슷비슷했다. 시멘트 벽에 페인트를 칠해놓은 업소도 있었고, 선탠한 유리 벽에 유치한 그림을 코팅해놓은 업소도 있었다. 사람이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너무 많지도 않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왠지 사줄 것 같았다. 용기를 내서 도전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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