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111화>
다음 날은 그 가게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언니들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그날도 날씨가 참 좋았다. 얼굴을 어루만지는 햇빛에서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책이라도 한 권 들고 나올 걸 그랬다고, 아직 아무도 없는 유흥가 뒷골목에 혼자 서서 후회했다.
“어? 어제 그 오빠네.”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잠깐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누가 와서 아는 체를 했다. 고개를 들고 보니 생전 처음 보는 언니가 서 있었다.
“누구시더라?”
“어제 봤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어제는 너무 많은 언니들을 봤다. 질질 끌려다니다 바이브레이터까지 압수당했다. 그 현장에 있던 언니들 중 한 명 같았다.
“들장미에서 일해요.”
출근하는 길이라며,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안부까지 걱정해주는 걸 보니 마음만은 비단결처럼 고운 언니 같았다. 얼굴도 수수하니 착해 보였다.
“어제는 그 언니가 좀 짓궂었죠? 원래는 착한 언닌데 장난이 좀 심해서 그래요. 이해해주세요.”
‘아방궁’에서 일하는 언니라고 했다. 예명은 마돈나, 본명은 모른다. 상고 나와서 동생들 공부시키랴, 가족들 먹여 살리랴, 어쩔 수 없이 이 바닥에서 일하는 불쌍한 언니라고 했다.
“얌전한 애들은 이런 데서 일 못 해요.”
사는 게 험하면 성격이 괄괄해진다. 장난이라도 치지 않으면 현실을 버틸 수 없다. 처음에는 얌전했던 애들도 이 바닥에서 몇 년 몸을 굴리다 보면 그 언니처럼 거칠어진다.
“그러니까 오빠가 이해하세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사정이 참 딱했다. 어제는 내가 너무했나?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래도 그 언니 약속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지켜요. 오빠 물건 좋다고 여기저기 입소문 내고 다녀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 나는 얼마나 옹졸한 인간이었던가! 반드시 되찾으리라, 기필코 복수하리라, 이를 갈며 다짐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반면 그 언니는, 비록 유흥가 뒷골목이지만 이런 곳에도 아직 신뢰와 믿음이 남아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메이저 사회에서는 멸종해버린 믿음과 신뢰가 이런 밑바닥 리그에서는 아직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역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왠지 가슴이 뻐근했다.
“저도 어제 체험해봤는데, 성능도 우수하고 가격도 저렴하고……. 만족스럽더라고요. 그래서…….”
언니가 갑자기 꽈배기처럼 몸을 배배 틀기 시작했다. 출근 전이라 화장기 없는 얼굴이 발그레, 고운 분홍 빛깔로 달아올랐다.
“하나 구입하려고요.”
그렇게 개시를 했다. 바이브레이터 하나를 건네주고 만 원짜리 한 장을 받았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라면에 계란을 넣은 고급 안주로 축하 파티를 해야지, 생각했다.
“많이 파세요.”
한동안 같은 자리에서 장사를 계속했다. 입소문의 위력은 대단했다. 인근 가게에서도 언니들이 몰려왔다. 하루에 열 개도 팔고 스무 개도 팔았다. 그렇게 번 돈은 꼬박꼬박, 착실하게 저금했다. 내일을 위해서였다. 나중에는 ‘물보라’, ‘밤안개’, ‘연예인’ 하는 식의 업소 이름들까지 줄줄 꿰게 되었다.
“오빠, 우리 가게에 언제 놀러 올 거야?”
“돈 많이 벌면 놀러 갈게요.”
“그럼 돈 많이 벌어서 꼭 놀러 와. 내가 잘해줄게.”
길거리에서 만나면 가볍게 인사를 나눌 정도로 안면을 트고 지내는 언니들까지 생겼다. 하지만 화사하고 아름다운 봄날은 역시 길지 않았다. 열흘 동안 붉게 피는 꽃이 없다고 해서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돌이켜보면 좋은 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그리고 사정없이 내리쬐는 땡볕처럼, 혹은 거칠게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시련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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