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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2.03 09:18 수정 : 2015.02.03 09:18

강태식 소설 <114화>



11.


사람들은 별것도 아닌 일에 인생을 낭비하다가 정작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만다. 자기 꼬리를 잡으려는 강아지처럼 같은 자리를 맴돌며 헉헉거리지만 결국 그것은 신기루일 뿐이다. 그리고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어, 어디 갔지?”

한동안 바이브레이터를 팔러 다니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나중에는 아파트 단지에도 들어가고 지하철역에서도 돌아다녔다. 그래서 팔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매일매일 진흙탕 행군이었다. 몸도 망가지고 마음도 망가졌다. 석 달 넘게 수입이 없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쓰린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강소주를 마셨다.

어제도 그랬다. 몸은 지쳐 있었고, 마음은 쓰라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깐 들른 슈퍼에서 소주 한 병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소주 한 병으로 쓰린 마음을 달랠 수 있을까? 잔고가 바닥난 통장과 밀린 공과금을 잊을 수 있을까? 어둡기만 한 현실은? 해가 뜨지 않을 것 같은 내일은? 그런 걸 모두 잊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형편에 맞지 않는 지출을 하고 말았다. 주인아주머니가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준 소주 세 병을 한 손에 들고 슈퍼에서 나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형광등 스위치부터 올렸다. 탈칵! 다시 내렸다 올렸다. 탈칵, 탈칵!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익숙한 반지하 단칸방의 풍경이 어둠에 싸여 낯설어 보였다. 처음에는 정전이라고 생각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정전이 아니었다. 환하게 켜진 가로등 불빛이 겨울바람처럼 불어와 눈이 시렸다. 옆 건물에도, 뒤 건물에도, 내가 사는 반지하 단칸방 바로 윗집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환하고 따뜻한 불빛이 창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밑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눈에 선했다. 땅바닥에 겨우 턱걸이를 하고 매달려 있는 작은 창문 하나도 보였다. 그 창문만 네모난 먹지처럼 캄캄했다. 너무 캄캄해서 마음이 아팠다. 몇 달 전부터 전기세 독촉장이 날아왔다. 나중에는 그게 경고장으로 변했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날짜를 확인할 때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때는 현실감이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막연하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도 되지 않았다. 아무리 스위치를 올려도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정들었던 반지하 단칸방은 암초에 부딪힌 선박처럼 깊은 어둠 속으로 침몰해 있었다. 그리고 네모난 먹지처럼 캄캄한 창문 하나만 남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부엌에 앉아 강소주를 마셨다. 소주잔을 사용하는 호사 같은 건 누릴 수 없었다. 그냥 병째 들고 꿀꺽꿀꺽 마셨다. 그렇게 한 병을 비우고 나니 문득 외로웠다.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달랑 혼자만 버려진 느낌이었다. 어디선가 휘잉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저 멀리 사구 너머에서 총총히 빛나는 아름다운 별 무리. 그걸 보면서 오! 감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연료가 가득 찬 지프에 물과 식량을 꽉꽉 채워 넣은 관광객들뿐이다.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면 사막 한복판에서 맞이하는 외로운 밤도 얼마든지 멋진 추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길을 잃어버린 나 같은 인간은…… 관광객들과는 확실하게 입장부터가 다르다.

“후유.”

한숨을 내쉬며 소주 한 병을 새로 땄다. 한 모금, 한 모금, 아무리 마셔도 펑 뚫린 마음은 달랠 수 없었다. 소주는 깜짝 놀랄 만큼 썼고, 마시면 마실수록 계속 써지기만 했는데, 잠깐 눈을 감았다 떠도 그대로인 어둠이, 아침이 올 때까지 끄떡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어둠이, 하지만 너 같은 인간에게 아침이 올까 보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어둠이, 그때 나에게는 소주보다 훨씬 더 쓰고 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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