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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가드를 올려라>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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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118화>
지난날, 원색적이고 무분별한 저질 낙서의 홍수 속에서 적지 않은 비난과 차가운 냉대를 한 몸에 받으며 몸살을 앓아오던 우리 화장실 문단계에,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 밀도 있는 주제의식과 완성도 높은 문체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육담계의 대문호 대걸레. 수많은 시리즈물을 발표하면서 화장실 문단의 도스토옙스키라고 불린 그의 마지막 친필 낙서가 발견된 곳은 아지트에 딸려 있는 화장실 우측 벽면이었다.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열화와 같은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 연재 장소에 대한 언급도, 독자들이 달아놓은 댓글도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확인할 길이 없어 답답했다. 어디로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내가 없는 동안 아지트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걸레의 마지막 친필 낙서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 밑에 댓글을 달았다. 뭐라고 써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먼 훗날 언젠가, 만약 대걸레가 보게 된다면, 지금의 이 외로움과 슬픔을, 멤버들에 대한 그리움과 겨울바람처럼 시리게 파고드는 고독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내 작고 소박한 바람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그런 댓글을 달고 싶었다.
유성펜을 손에 들고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적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여인처럼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내 마음을 대걸레가 알아줄까?
우리는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을 수 있는 거냐?
밀린 방세는 보증금으로 해결했다. 밀린 공과금도 보증금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보증금을 날렸지만 미련 따위 없었다. 더 이상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현관과 어두운 부엌과 어두운 단칸방, 밤낮이 없었다. 벽에 걸린 시계도 어두웠고, 두 벌뿐인 숟가락과 젓가락도 어두웠고, 좌변기 곁에 있는 두루마리 휴지도 어두웠으며, 심지어는 건전지가 다 된 손전등마저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뚜껑이 덮이고, 탕탕 대못을 박아놓은 관 속 같았다. 그곳에 혼자 누워 있는 동안, 어두운 소주를 마시고, 어두운 한숨을 쉬며, 가끔 어두운 눈물을 흘리는 동안, 차츰 피부도 어두워지고 표정도 어두워지고 성격마저 어두워지고 말았다. 그래서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했다. 몇 년 동안 정들었던 집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필요한 것들만 대충 챙겼는데도 이삿짐이 꽤 많았다. 업자에게 맡길 수도, 용달을 부를 수도 없는 처지라 대중교통을 이용한 나 홀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무거운 짐부터 옮겼다. 버스를 타고 아지트까지 가서 등에 진 짐을 부렸다. 힘들면 쉬고, 땀이 나면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물을 마셨다. 바이브레이터 박스는 맨 마지막에 날랐다. 버릴까? 말까? 마지막까지 고민한 품목이었다. 그래도 팔면 돈이 될 물건이라 가져가기로 했다.
몇 차례에 걸쳐서 바이브레이터 박스들을 나르는 동안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고 밤이 찾아왔다. 아지트에 도착하자마자 벽에 붙어 있는 스위치를 탁 하고 올렸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형광등에서 와아, 군중의 함성처럼 밝은 빛이 쏟아져 내렸다. 오랜 가뭄 끝에 비를 만난 농부의 심정이었다. 이젠 걱정할 필요 없어,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어두웠던 성격도 조금은 밝아진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눈부신 형광등 불빛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밝아진 분위기 속에서 나는 몇 달 만에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았다. 여기 살면서 계속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한 사람 두 사람씩, 명절날 고향 집을 찾아가는 귀성객들처럼 돌아오지 않을까? 몇십 년 만에 상봉하는 이산가족처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짐을 정리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려본 것도 몇 달 만에 처음이었다.
저녁은 내실에서 끓인 라면 두 개로 때웠다. 이사하면서 축난 몸을 생각해서 계란도 풀었다. 후루룩후루룩, 젓가락질 몇 번에 면이 바닥나고, 노른자와 흰자가 해초처럼 떠다니는 국물도 꿀꺽꿀꺽, 순식간에 해치웠다. 싱크대 앞에 서서 뚝딱, 얼마 안 되는 설거지를 끝마치자 문제가 생겼다. 불은 환한데 할 일이 없었다. 매트 위에 누워 멀뚱멀뚱 천장만 바라보고 있으려니 생각만 많아졌다. 멤버들이 없는 아지트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스마일 영감님은 매트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몰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수색 작업을 계속했지만 아지트 어디에서도 영감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구둣주걱 아저씨와 식칼 아줌마, 대걸레가 없는 아지트가 이렇게까지 낯설고 쓸쓸할 줄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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