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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2.10 10:50 수정 : 2015.02.10 10:50

강태식 소설 <119화>



소화도 시킬 겸, 잡생각도 없앨 겸 몸을 움직여보기로 했다. 식칼 아줌마의 샌드백 앞에 서서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두 손으로 가드를 올리자 정말 1라운드 시작 공을 기다리며 사각의 링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샌드백을 상대 선수라고 생각했다. 가드 너머로 상대 선수를 노려보며 이리저리 스텝을 밟았다. 특히 리듬감에 신경 썼다. 부드럽고 경쾌한 템포에 맞춰 좌우로 상체를 흔들었다. 그렇게 샌드백 주위를 두세 바퀴 돈 다음, 본격적으로 주먹을 뻗기 시작했다.

툭! 처음에는 가볍게 레프트 잽을 날렸다. 툭! 툭툭! 몇 번 더 같은 구질의 주먹으로 상대 선수의 기량을 체크했다. 맷집은 세지만 발은 느린 것 같았다. 맞받아치는 주먹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툭툭! 잽을 몇 방 더 날리고 탐색전을 끝냈다. 라이트 스트레이트는 레프트 잽과 함께 날리는 게 정석이다. 툭, 레프트 잽이 들어가는 걸 확인한 다음, 그 리듬 그대로 퍽,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안면에 적중시켰다. 삐걱삐걱, 천장에 매달려 있던 샌드백이 앞뒤로 조금씩 흔들렸다. 데미지를 입혔다는 확실한 증거다. 충격을 받은 상대 선수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기본기가 전혀 안 돼 있다. 실력차이가 너무 난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끝낼 수 있다. 하지만 화려하게 이기고 싶었다. 깜짝 놀랄 만큼 화려한 케이오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툭툭! 가볍게 다시 잽을 날렸다. 삐걱삐걱, 샌드백은 점점 크게 흔들리고, 원투, 원투, 원투 스리, 날리는 주먹마다 기분 좋게 들어간다. 팡팡! 메아리치는 타격음이 그렇게 경쾌할 수가 없다. 레프트 훅, 라이트 보디, 쉴 새 없이 펀치를 퍼부으며 상대 선수의 페이스를 흔들어놓는다. 몸이 풀린 덕분에 평소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빠바밤, 빠바밤, 옆집에 사는 누가 영화 〈록키〉의 주제음악을 틀어놓은 것 같다. 이미 끝난 경기다. 이제 큰 거 한 방이면 끝이다. 하지만 어느새 땡! 1라운드의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린다.

잠깐 코너에 앉아서 쉰다. 헉헉,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온몸에서 땀이 흐른다. 경기 내용은 일방적이었지만, 체력 소모는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샌드백을 노려보면서 생각한다. 운이 좋은 놈이다. 공이 살렸다. 하지만 1라운드까지다. 2라운드에서 끝낸다. 3라운드는 없다. 깜짝 놀랄 만큼 화려한 케이오로 마지막을 장식하려면 역시 라이트 어퍼컷이다. 고개가 뒤로 넘어가고, 마우스피스가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가고, 상대 선수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멋진 장면을 상상해본다. 원, 투, 스리……. 레퍼리의 카운트와 함께 경기도 끝난다. 관중들의 갈채를 받으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상대 선수를 뒤로하고, 머리에 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링에서 내려온다. 한 마리 외로운 늑대처럼……. 땡! 2라운드의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린다.

상대 선수는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다. 스텝을 밟는다기보다는 계속 발을 헛디디며 겨우 중심을 잡고 있는 느낌이다. 호흡도 불안정하다. 어깨로 거친 숨을 쉬고 있다. 전의를 상실한 얼굴에는 공포만이 가득하다. 1라운드에서 입은 데미지가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이다. 결정타를 날리기에 앞서 몇 번 더 툭툭, 잽을 던져본다. 가드가 제법 견고하다. 스텝을 밟으면서 빈틈을 찾는다. 보디를 공격하면 가드가 열린다. 비어 있는 옆구리로 강펀치를 날린다. 제일 단련하기 힘든 곳이 복부다. 깊숙하게 파고들어 소나기 펀치를 퍼붓는다. 기회는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가는 것이다. 팔이 떨어지고, 드디어 가드가 열린다.

상대 선수의 턱이 시야에 들어온다. 침인지 땀인지, 턱 끝에 고여 있던 물방울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걸 신호로 라이트 어퍼컷을 날린다. 자세를 낮춘 다음 왼발을 한 발 앞으로 내민 상태에서 옆구리의 회전력으로 주먹을 뻗으면 강한 라이트 어퍼컷을 날릴 수 있다.

“팡!”

짜릿한 손맛이 온몸에 있는 조직세포 하나하나로 퍼져나간다. 대뇌피질이 전율하고, 뇌하수체가 몸을 떤다. 아, 모든 걸 불태우고 하얗게 재만 남은 느낌이다. 복싱의 꽃은 역시 라이트 어퍼컷이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라이트 어퍼컷처럼 큰 기술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동작이 큰 만큼 허점도 많기 때문이다.

“퍽!”

맞받아치는 주먹은 예상하지 못했다. 가드를 올릴 틈도, 주먹을 피할 새도 없었다. 저만치 밀려났던 샌드백이 어느새 되돌아와 안면을 강타했다. 온몸의 무게를 실은 엄청난 필살기였다. 고개가 뒤로 넘어간 쪽은 이 몸이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저 멀리 날아가고 있는 것도 내 마우스피스였다. 한순간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링 위에 쓰러지자마자 레퍼리가 달려와 카운트를 시작했다.

원, 투, 스리…….

사이좋게 터진 쌍코피가 줄줄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링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강한 조명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다.

코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코치와 관장을 겸하고 있는 스마일 영감님이 가로로 서 있었다. 이쪽을 향해 바짝 가드를 올리며 애절한 눈빛으로 파이팅 자세를 잡고 있었다.

일어나! 일어나서 가드를 올리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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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강태식의 <가드를 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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