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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가드를 올려라>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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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123화>
대국 중인 바둑 기사가 돌을 던지거나 전쟁터에 나간 병사가 총을 버리면, 그건 상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항복을 의미한다. 어떤 싸움에서든 손에 쥐고 있던 무기를 먼저 내려놓는 쪽이 진다. 발목에 차고 있던 모래주머니를 풀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걸 기권패라고 부른다. 만회 불능에 투지 상실……. 내가 없는 동안 아지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걔가 그렇게 된 건 전부 너 때문이다.”
대걸레가 어떻게 됐는지, 그게 왜 나 때문인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식칼 아줌마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샌드백이 없으면 훈련을 할 수 없는 법이다.”
대걸레에게는 스파링 파트너가 있었다. 그 스파링 파트너를 상대로 거짓말 훈련을 해왔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연습 상대가 없어졌다. 바이브레이터를 팔러 돌아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다. 생계가 걸린 문제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대걸레는 혼자서 거짓말 훈련을 했다. 참말을 하면 파란불이, 거짓말을 하면 우웩! 빨간불이 들어왔다.
“오늘은 날씨가 좋다.”
그날은 날씨가 흐렸다. 우웩! 빨간불이 들어왔다.
“메주는 콩으로 만든다.”
파란불.
처음에는 참과 거짓이 확실한 사실 명제로 훈련을 계속했다. 하지만 사실 명제에는 한계가 있었다. 너무 단순했다. 한 걸 안 했다고 하거나 있는 걸 없다고 하는 건 훈련이 되지 않았다. 대걸레는 정치인이 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가치 명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우웩! 대걸레에게 세상은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다.”
우웩! 예전에는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한국 호랑이가 멸종된 건 어쩌면 담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대걸레는 잠깐 딴생각을 했다.
“대한민국은 평등사회다.”
이번에도 우웩! 빨간불이 들어왔다. 돈과 권력이 신분을 결정한다. 잘사는 놈은 계속 잘살고, 못사는 놈은 계속 못산다.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있는 집에서 태어난 놈은 판검사가 되고, 없는 집에서 태어난 놈은 잘돼봤자 회사원이다. 이름이 바뀌었지만 귀족과 노예가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가 대한민국이다.
대걸레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거짓말 훈련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웩! 우웩! 구토를 하는 동안 세상을 알게 되었다. 거대한 회의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너무 부조리했다. 대걸레에게 세상은 커다란 모순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런 곳에서 계속 살아야 할 이유도 잃어버렸다.
“여기서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어느 날 대걸레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빈 껍데기처럼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 같았다. 스마일 영감님은 애처로운 눈길로 대걸레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고, 식칼 아줌마는 못 들은 척 샌드백만 두드렸다. 응원도 위로도 해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마음은 안타깝기만 했다.
“샌드백만 있었다면 걔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걸레가 그렇게 된 건 모두 내 책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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