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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가드를 올려라>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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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125화>
“순식간에 두 인간이 맛이 갔다. 어떻게 손써볼 시간도 없었다.”
구둣주걱 아저씨와 대걸레가 그렇게 망가지자 아지트의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았다. 웃을 일이 없어졌다. 게다가 그때는 식칼 아줌마 역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발차기를 날릴 생각도, 주먹을 뻗을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한곳만 바라보며 꾸준히 달려왔다. 목표가 확실했기 때문에 힘든 훈련을 견딜 수 있었다. 무공도 전성기 못지않게 고강해졌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빠짐없이 체크했기 때문에 돌주먹의 급소가 어딘지는 눈을 감고도 환했다. 주먹이나 발차기 한 방이면 돌주먹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기회는 많았다. 회사에서 돌아온 돌주먹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었다. 회식이 있는 날에는 코를 골며 잠꼬대까지 했다. 복수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도망치기에 바빴다. 기회가 찾아와도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돌주먹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노력했다. 돌주먹이 등을 보이면 베란다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거나 화장실에 가면서 자리를 피했다. 어쩌면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허점을 보이지 마요, 여보!’ 이런 생각까지 했다. 불구가 된 소소와 아령, 사랑하는 두 아우를 생각하면 복수심이 끓어올랐다. 몇 번은 지쳐 잠든 돌주먹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새벽을 맞이한 적도 있었다. 돌주먹은 무방비 상태였다. 마음만 먹으면 복수는 쉬웠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불을 덮고 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파랗게 새벽이 밝아오고, 지붕 위에 앉은 참새 몇 마리가 지저귀더니 마침내 아침이 찾아왔다. 나는 부엌에 가서 밥을 안치고 콩나물을 다듬었다. 돌주먹을 출근시키고 난 뒤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했다.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게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목표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인생에 나침반 같은 건 없었다.”
식칼 아줌마의 판돈은 자신의 인생 전부였다. 그 판돈을 모두 걸고 도박을 했다. 하지만 식칼 아줌마는 이제 지는 것도, 이기는 것도 무서웠다. 내 판돈을 잃는 것도 싫었지만, 남의 판돈을 쓸어오는 짓도 하기 싫었다. 도박 같은 건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이 변했고,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다. 복수는 이제 의미가 없었다. 나침반을 잃어버린 식칼 아줌마는 혼란스럽고 막막하기만 했다. 때마침 구둣주걱 아저씨와 대걸레마저 그렇게 되고 말았다. 발차기를 날릴 때도, 주먹을 뻗을 때도 의욕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샌드백만이 삐걱삐걱, 힘없이 흔들릴 뿐이었다.
“우리는 구멍 난 배를 타고 있었다. 한번 물이 들어오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돌을 던지고, 총을 버려야 할 시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멤버들은 핀치에 몰린 채로 고전 중이었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전세가 뒤집힐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그때 누군가 수건을 던졌다. 링 위로 날아든 하얀 수건이 항복을 알리는 백기처럼 쓸쓸한 몸짓으로 팔랑거렸다. 애절한 눈길로 멤버들을 지켜보고 있던 스마일 영감님이었다.
“모두 수고했어.”
영감님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거기에도 누가 걸어놓았는지 모를 백기가 바람에 팔랑이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건 영감님의 속옷이었다.”
캄캄한 밤이었다. 저 멀리 도시의 야경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끼어 있는 것 같았다. 휘영청 밝은 달도, 뿌려놓은 듯 반짝이는 별 무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 바람에 실려 부웅, 가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주위는 숨이 막힐 것처럼 적막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거기에 미련 같은 감정은 없었다. 지친 얼굴과 축 늘어진 어깨뿐이었다. 구둣주걱 아저씨도, 대걸레도, 스마일 영감님까지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잠깐 잠잠했던 바람이 휘잉, 다시금 머리채를 잡아 흔들 때쯤, 투둑! 모래주머니 두 개가 옥상 바닥에 떨어졌고, 그와 동시에 대걸레가 기지에서 발진하는 거대 로봇처럼 선 자세 그대로 밤하늘 저 멀리 날아올랐다.
투둑!
대걸레 다음은 구둣주걱 아저씨가,
투둑!
계속해서 스마일 영감님이 그 뒤를 이었다.
투둑!
식칼 아줌마도 모래주머니를 풀어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날아오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날아오르지 않은 거군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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