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127화>
극단적인 감정을 장시간 유지하는 건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이다. 사랑이 증오로 변하기도 하고, 증오가 사랑으로 변하기도 한다. 살다 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다. 사랑 한 스푼과 증오 한 스푼을 같은 용기에 적당히 넣고 골고루 저어주세요. 그게 인생이다.
“임신한 사실을 제일 먼저 남편인 돌주먹에게 알렸다. 돌주먹은 나 이상으로 기뻐해주었다. 요즘 돌주먹은 원형탈모증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병원에 다니며 모발관리를 받고 있지만 별 효과는 없다고 한다. 회사생활에 시달리며 받는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인 것 같다. 잦은 접대용 술자리는 내장비만의 원인이 되었다. 아무리 헐렁한 옷을 골라 입어도 불룩 튀어나온 똥배의 볼륨감은 감출 수 없게 되었다. 체형 자체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곧 있으면, 아무리 몸부림치며 저항해봐도 대머리가 된다. 생활의 일선에서 뛰고 있는 이 나라의 평범한 가장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런 돌주먹이 나를 닮은 딸을 낳고 싶다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돌주먹은 이미 내가 예전에 알고 있던 그 돌주먹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돌주먹은 가정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앞으로 태어날 자식과 아내인 나를 사랑하는 그냥 평범한 이 나라의 가장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꾸 숱도 몇 가닥 없는 정수리에 눈이 갔다. ET처럼 불룩 튀어나온 똥배의 볼륨감을 볼 때도 마음이 짠했다. 왈칵, 눈물이 솟았다. 울면서 수도 없이 미안했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앞으로는 더 잘하겠다고 다짐도 했다.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아내가 되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도 했다…….”
현재 식칼 아줌마는 반 이상의 몸무게를 회복한 상태라고 한다.
“몇 킬로그램인데요?”
“그걸 알게 되면 너는 죽는다.”
아이도 생기고, 사랑하는 남편도 생겼다. 이만큼 확실한 추가 또 있을까? 왠지 온화하게 변한 식칼 아줌마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살 곳은 여기 이 집이다. 붕 같은 건 잊기로 했다. 물론 가끔씩은 멤버들의 얼굴이 보고 싶어질 때도 있다. 그래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멤버들의 얼굴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하지만 될 수 있는 한 땅바닥을 보면서 살려고 노력한다. 요즘은 교회도 다닌다. 이규호 목사님이 계시는 ‘큰 은혜 교회’라고 말씀이 아주 좋다.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네가 이런 나를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거기다 대고 이해한다고도, 이해할 수 없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그냥 무슨 결정을 하기 위해 망설이는 듯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식칼 아줌마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부탁 하나만 하자.”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식칼 아줌마에게 나는 그러시라며 웃어주었다.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라.”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웃어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건…… 많지 않은 액수다.”
식칼 아줌마가 탁자 위로 내미는 봉투를 보고 왈칵, 눈물이 치솟았다.
“저도 돈 있어요.”
봉투를 다시 식칼 아줌마 쪽으로 밀며 사양했다. 구둣주걱 아저씨의 유료 화장실 덕분에 밥은 굶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까불지 말고 가져가라. 많이 주지 못해서 미안할 뿐이다.”
더 이상은 사양할 수 없었다. 액수가 얼마든, 그게 많든 적든, 봉투 안에 든 건 나를 생각하는 식칼 아줌마의 진심 어린 마음이었다. 식칼 아줌마가 주는 마지막 작별선물이었다.
고맙습니다, 식칼 아줌마!
그리고 행복하셔야 해요.
밤하늘에는 달과 별만 떠 있는 게 아니다. 비행기나 인공위성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이다. 검은 천으로 덮어놓은 듯 캄캄한 밤하늘에는 스마일 영감님의 웃는 얼굴이 있고, 동생 같은 대걸레의 가슴 아픈 사연이 있으며, 겉보기와는 다른 구둣주걱 아저씨의 착한 마음씨가 있다. 그래서 고개를 들면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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