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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 오페라 가수들의 예민한 자존감은 21세기 과학의 시대에 터부라는 미신을 전통처럼 존속시키는 힘이다. 덴마크 코펜하겐 오페라 극장의 웅장한 모습. Waagner-Biro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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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구자범의 제길공명
(1) 터부 요청하는 사회
▶ 구자범 한국의 대학에서 술과 철학을, 독일의 대학에서 커피와 음악을 배웠다. 15년간 독일의 여러 오페라극장에서 지휘를 하다가, 사람 냄새 그리워 한국에 돌아와 교향악단을 맡았으나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음악계를 떠났다. 지금은 바닷가에 홀로 살면서 뜻있는 좋은 사람들과 술 마실 궁리를 한다. <한겨레> 토요판에 격주로 연재하는 ‘제길공명’(諸吉共鳴)은 ‘모두가 좋은, 함께하는 떨림’을 뜻하는 필자의 신조어다.
예전에 내가 있었던 독일 하겐 오페라극장의 무대 입구 벽에는 ‘토끼 발’이 하나 걸려 있었다. 왜 징그럽게 이런 게 걸려 있느냐고 물어보니, 공연을 망치지 않도록 행운을 가져다주는 부적이란다. 실제로 서양에는 지금도 살아 있는 토끼의 발을 잘라 장식용 브로치나 열쇠고리 등을 만들어 부적으로 차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독일어권의 모든 극장에서는 첫 공연 시작 전에 ‘토이, 토이, 토이’(toi, toi, toi)라고 적은 쪽지와 조그마한 선물을 부적처럼 주고받는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잘하라며 어깨에 대고 ‘토이, 토이, 토이’라고 말한다. 그걸 고마워하며 ‘당케’라고 대답했다가는 또 난리가 난다. 주문의 효험이 없어진다나? 절대 고맙다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다시 해준다. 눈치 빠른 사람은 금방 알아챘겠지만, 이 주문은 바로 ‘퉤, 퉤, 퉤’ 침 뱉는 소리다. 고사 지내기 전에 고수레를 하는 것 같은 참 귀엽고 재미있는 전통이다.
유럽 극장의 전통 중에는 이처럼 공연 전에 서로를 격려하는 장난스런 부적 말고도 평소에 무대 위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엄격한 ‘터부’(금기)가 있다. 현대사회에 유럽 오페라 무대처럼 터부가 많은 곳이 또 있을까? 무대 위에서는 연출이 아닌 한 절대로 음료수를 마셔도 안 되고, 모자를 써도 안 되고, 외투를 입어도 안 된다. 휘파람을 불어도 안 되고, 무대를 가로질러 가도 안 된다. 이밖에도 ‘안 되는 것’이 외우기 힘들 정도로 많다.
나는 극장에 들어간 초기에 무대 리허설 시작 전 아무 생각 없이 커피 한 잔을 들고 외투를 입은 채 피아노가 있는 곳까지 무대를 가로질러 갔다가, 거기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거의 중범죄인 취급을 당하며 정신이 나갈 정도로 혼난 적이 있다. 그 뒤 왜 이렇게 많은 터부들이 있는지 묻는 내게 극장의 원로들은 마치 무슨 ‘안전성’ 때문인 양 설명하곤 했다. 예를 들면 ‘옛날 극장에서는 휘파람 신호로 무대의 기계장치를 움직였기 때문에 잘못하면 오해해서 사고가 날 수가 있다’거나 ‘음료를 바닥에 흘리면 미끄러져 다칠 수 있다’는 식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단지 이런 이유만으로 공연 관계자들이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수많은 터부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모자 쓰거나 휘파람 불면 안되고 무대를 가로질러 가도 안된다
터부가 많은 유럽 극장의 전통
이해야 되지만 왜 아직 존속될까
무대 위에서 궁금증이 풀렸다 터부를 깬 마녀를 사냥하며
자신의 책임 전가하는 무대에서
작은 연주 실수에 괴로워하던
바이올린 수습단원의 자괴감은
그 어떤 자존감보다 멋있었다 소프라노 가수와 테러리스트의 차이점은 아마 이런 터부의 기원을 찾아보면 결국 고대의 제전으로 소급될 것이다. 고대에는 주술과 예술이 구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전이 이루어졌으므로, 제단과 무대의 유사성이 있으리라는 점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러니 제단의 신성함을 유지하고자 한 여러 요소가 무대에 투영되어 지금도 남아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종교와 예술이 분리된 현대사회에서는 그것이 그저 조심스레 지키는 ‘에티켓’ 정도로 충분하지, 절대 어기면 안 되는 무시무시한 ‘터부’여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21세기 과학의 시대에 도대체 누가, 왜 이 터부라는 미신을 전통처럼 존속시키는 것일까? 이 궁금증은 무대 위 음악가들의 예민한 자존감을 마주하면서부터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문제: 소프라노 가수와 테러리스트의 차이점은? 답: 테러리스트와는 협상이 가능하다.’ 이런 유명한 농담이 있을 정도로 모든 음악가는 자존감에 예민하다. 사실 그런 자존감도 없다면 그냥 녹음된 옛날 거장의 음악을 들으면 되지 굳이 자기가 똑같은 음악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므로, 그 자존감은 매우 중요하고 정당하다. 이 자존감은 여럿이 함께 음악을 할 때 종종 갈등을 낳을 만큼 강하다. 독일에서 나와 친했던 음악가 중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오페라 가수로 예를 들자면, 이중창을 할 때 옆 가수 성량이 작으니 당신도 좀 작게 내달라고 부탁할 경우 대부분은 따로 찾아와 양손을 벌리고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한다. 이런 난처한 얘기를 할 때는 꼭 ‘마에스트로’라고 부르면서. “마에스트로, 내가 이런 성량을 만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세요? 저 상대역 성량에 맞추면 객석에 잘 들리지도 않아요. 관객들은 내가 노래를 못한다고 생각할 텐데, 왜 내가 저 사람 때문에 무대에서 욕을 먹어야 하나요?” 이 정도의 자존감으로, 오페라 가수는 오롯이 자신이 무대의 중심이라 여긴다. 실제로 공연의 중심이기도 하다. 그가 아리아를 부를 때는 지휘자도 다른 때와 달리 ‘이끌어’ 가는 지휘가 아닌 온전히 그의 능력과 조건에 따라 ‘맞추어’ 주는 지휘를 하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무용단, 무대 관계자 등 모두가 그에게 집중한다. 노래 가운데 어려운 부분에서 이상한 동작이나 자세를 요구했던 괴짜 연출가만 제외한다면, 모두 그 가수 편에서 응원하는 것이다. 무대 위의 오페라 가수는 월드컵 경기에서 승부차기를 하는 선수와 비슷하다. 자기의 몸을 악기 삼아 소리를 내는 사람에겐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모든 사람이 그토록 응원하는 가수가 무대 위에서 갑자기 헤맨다면 그를 보는 관객도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운데, 그 당사자는 오죽할까. 남들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도 그 강한 자존감에 상처받은 가수는 어떤 핑계라도 대고 싶을 것이다. 거의 매일 공연이 있는 독일 극장에서 공연 뒤 가수들이 웃으며 대는 핑계는 참 다양하다. 가장 흔한 ‘감기 기운이 있어서’부터 ‘의상이 자꾸 흘러내려서’ ‘상대 가수의 입 냄새가 심해서’ 혹은 ‘수플뢰르(무대 밑에서 가사 앞부분을 일러주는 사람)의 소리가 안 들려서’ 심지어는 ‘무용수가 춤을 출 때 입으로 먼지가 들어와서’에 이르기까지 마치 핑계를 만들려고 밤마다 무슨 백과사전을 뒤져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별별 재미있는 것이 많다. 하지만 웃지 못할 큰일이 벌어져 이런 핑계도 댈 수 없고 순전히 자기가 책임져야 할 때 거꾸로 남을 대놓고 욕함으로써 자신이 벗어날 수 있는 잔인한 탈출구가 하나 있으니, 바로 자기가 잘못한 이유가 어처구니없게도 누군가 터부를 어겼기 때문이라고 ‘마녀사냥’을 하는 전통 아닌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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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발은 유럽의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을 망치지 않도록 행운을 가져다주는 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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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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