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경 소설 <3화>
십여 년 전,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중독되어 있었다.
우리는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그 나이 때는 흔히들 자신의 삶이 온통 비극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고 자기감정에 빠져든 채 술을 마셨다. 그녀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행복하면 불안해.
술에 취해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 것도 그 나이 때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잠시도 떨어지기 싫었던 우리는 학교에서 가까운 연희동에 방을 얻었다. 지방 출신인 그녀는 부모님께 기숙사에서 생활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서울에, 그것도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던 나는 갖은 핑계를 대고 겨우 집을 나왔다.
그 작은 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에겐 모두 처음이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서로에게 얽혀들었다. 현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난생처음 맛보는 쾌락에 빠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우리는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섹스 후에도 나는 그녀에게서 몸을 빼지 않았다. 살갗만 스쳐도 불쾌감이 치미는 계절에조차 우리는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고, 겨울에는 기다란 목도리로 두 사람의 목을 함께 감고 다녔다. 해가 바뀌고 겨울방학이 끝나가던 어느 날이었다. 잠결에 서늘한 기운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그것이 그저 느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그녀는 내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희고 가느다란 두 팔을 치켜든 채로. 단단하게 모아 쥔 두 손에는 과도가 들려 있었고 칼끝은 나를 향해 있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났다는 걸 눈치챈 그녀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왜 울어?
나는 그녀가 나를 겨누고 있는 것보다 울고 있다는 사실에 더 당황했다.
이 행복도 결국은 끝나버리고 말 테니까.
그녀는 칼을 높이 든 자세 그대로 앉아 어깨를 들썩거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배꼽부터 천천히 핥기 시작했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점차 가느다란 신음으로 변했고 곧 우리는 하나가 됐다. 그날, 잠이 들 때까지 그녀는 손에 쥔 칼을 놓지 않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동기들은 우울한 감상에서 탈피해 현실로 뛰어들었다. 오로지 그녀 혼자 아직도 젖을 떼지 못하고 우는 아이 같았다. 그녀는 우리의 사랑이 끝나버릴 것을 두려워하며 이별이란 단어를 자주 입에 올렸다. 하지만 이별을 선언하고 며칠이 지나면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죽어버릴 거야. 죽어버릴 거라고.
그때마다 나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때론 모텔 방에서, 때론 낯선 동네의 놀이터에서, 때론 고층 빌딩 계단에서 그녀는 손목을 긋거나, 수면제를 삼키거나, 허리띠로 목을 졸랐다. 그것이 단순히 그녀가 사랑을 확인하는 방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망설임 끝에 결국 그녀에게 달려갔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복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라고 말하는 그녀였다. 그녀는 기꺼이 불행을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오직 나만이 그녀를 구원해줄 수 있다는 어리석은 믿음. 그렇게 몇 년을 더 보내고 난 뒤에야 나는 그녀가 불행 안에 머물러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그녀가 또다시 이별을 이야기했을 때 나는 미국으로 떠났다. 아니, 도망쳤다.
제일 먼저 자리를 잡은 곳은 로스앤젤레스였다. 그곳에서 학교에 다녔고 졸업할 때까지 살았으니 미국 땅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J와 함께 살았다. 섹스 파티에서 만난 알코올에 중독된 여자였는데, 언젠가 내가 술병을 빼앗자 끓는 물에 손을 집어넣으며 울부짖었다. J로부터 달아나 샌프란시스코로 옮겨갔고, 또다시 뉴욕으로, 마이애미로 옮겨 다니다 이곳 네바다 주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집에서 차를 몰고 30분만 달려가도 메마른 벌판이 나오는 곳. 그녀로부터 벗어나 미국까지 날아왔지만 늘 어둡고 축축한 무언가가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뿜어내는 불행의 기운이 이곳까지 뻗칠 때면 나는 한없이 우울해져 벌판으로 나갔다. 세상에서 가장 황량한 곳에 가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죽고 싶은가 아닌가. 벌판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 살고 싶다는 욕망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고 그 사실에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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