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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04 09:57 수정 : 2014.09.05 10:02

조수경 소설 <9화>



그날 밤, 그녀는 잠결에 몸을 심하게 들썩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바라봤다. 달빛에 물들어 파리해진 피부 밑으로 푸른 혈관이 길게 뻗어 있었다. 웅크리고 누운 그녀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마치 단단한 밧줄에 포박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여전히 꿈속에 머무르며 주먹을 꼭 쥐었다.

죽여버릴 거야.

그녀가 소리쳤다. 동시에 그녀가 눈을 떴다. 그녀는 웅크린 자세 그대로 텅 빈 눈을 뜨고 방 안을 둘러봤다.

비겁한 새끼.

꿈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도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울었다. 손톱을 세워 제 젖가슴을 후벼 팠다. 그녀는 입술을 씹으며 복수할 거야, 라고 말했다. 평생 후회하게 해줄 거야, 라고 한 것도 같았다. 나는 작은 돌멩이처럼 도드라진 그녀의 굽은 등뼈만 내려다봤다. 끝내 나는 그녀에게 왜 우느냐고 묻지 못했다. 지난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묻지 못했다. 묻는다고 해서, 또 그녀가 말해준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너무 먼 곳에서부터 멀어진 느낌이었다. 다시 그녀의 삶과 내 삶의 톱니를 맞물릴 용기가 생기지 않을 만큼.

다음 날, 아침을 먹으면서 그녀는 혼자서 여행하겠다고 말했다. 딱딱하게 구워진 토스트와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면서 그녀는 유쾌한 듯 떠들었다.

좀 걷다가 지치면 히치하이크를 할 거야. 영화에서 본 것처럼.

그녀는 엄지를 세우고 팔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웃었다. 나는 깊숙이 파인 티셔츠 안으로 드러난 그녀의 하얀 젖가슴을 바라봤다. 손톱에 뜯긴 상처마다 선홍빛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남겨두고 차에 짐을 실었다.

김윤환!

차에 오르기 전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그녀가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라스베이거스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조금 울었다.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해줬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고, 그녀를 사막 한가운데에 혼자 남겨두고 또다시 달아났다는 죄책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그녀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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