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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막은 섬세한 유리창이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의 주인공인 화가 미셸(쥘리에트 비노슈)은 각막과 관련된 질병으로 실명 위기에 처한다. 각막은 혈관이 존재하지 않아 우리 몸에서 가장 투명한 조직에 해당한다. 잘 보기 위한 진화의 결과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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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하리하라 눈을 보다
(6) 각막
▶ 하리하라 본명 이은희. 생물학을 전공해 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우연히 인터넷 블로그에 썼던 글들이 <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 등 책으로 묶여 나오면서 과학언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현재는 과학작가이자 강연자로 살고 있다. ‘하리하라’라는 인터넷 아이디를 필명으로, 세상에 퍼져 있는 과학에 대한 선입견과 오해를 걷어내는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한겨레> 토요판에서 격주로 ‘인간의 눈’과 본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한다.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은 세상이 파랗게 보일까. 어린 시절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도 얼마 되지 않아 그것이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만약 눈의 색에 따라 세상이 달라 보인다면 검은 눈을 지닌 내게 세상은 온통 검게 보여야 할 테니까. 그러자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가장 어두운 색인 검은 눈을 지닌 내가 보기에도 세상은 이토록 밝고 환한데, 그보다 밝은 색인 파란색이나 초록색 눈을 지닌 사람의 눈엔 세상이 더욱 밝고 환하게 보이는 건 아닐까.
우리는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세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를 보기 위한 장치인 눈 역시도 가능하면 세상의 모습을 가리는 방법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색이 있거나 굴곡이 있으면, 이를 통과한 빛은 색이 덧입혀지거나 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서 빛을 받아들이는 부분은 가장 투명하고 불필요한 왜곡이 없어야 한다. 눈에서 빛을 통과시키는 유일한 부분인 동공 자체는 하나의 구멍이며 동공이 형성되는 중간에 놓인 각막과 수정체가 그토록 투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투명한 시야 확보 위해 혈관을 포기
눈이 마음의 창이라면 각막은 그 창의 유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눈의 가장 바깥쪽에서 눈을 감싸는 외피의 일종이다. 대개의 창이 외벽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지 않듯 눈의 외피 역시도 앞쪽의 6분의 1만이 각막이며, 나머지 6분의 5는 공막이라고 불린다. 공막은 치밀한 섬유조직으로 흰색을 띠는데, 홍채를 제외한 눈의 대부분이 흰색으로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공막이 흰색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유해보면 외부에서 보는 눈은 공막이라는 흰 벽에 뚫린 투명한 각막의 창으로 세상과 연결된 셈이다.
각막은 눈이라는 창의 유리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좋은 유리창의 특성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 그 첫번째는 유리창은 외부를 잘 내다볼 수 있도록 맑고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각막은 첫번째 조건만큼은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각막은 우리 몸에서 가장 투명한 조직이다. 각막이 이렇게 투명한 것은 각막을 이루는 성분들의 구조가 균일하고 여기에 혈관이 없기 때문이다. 눈을 자세히 살펴보면 눈의 흰자에서는 붉은 실핏줄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눈동자 부분에서는 혈관이 보이지 않는다. 검은색이어서 가려져서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각막에 혈관이 존재한다면 혈관 내부의 적혈구나 혈관 자체가 시야를 가릴 수 있지만 그런 것이 없기에 우리는 붉은색 필터나 검은 그림자 없이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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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 층으로 구성된 복잡한 존재
안쪽 상처 크면 실명할 수도
혈관 없는 게 장점으로 작용해
각막은 신체 이식 중 최고 성공 튼튼하고 질긴 조직 아니라서
‘효과적 경보전략’으로 자기방어
먼지 한톨의 자극에도 반응하고
입으론 먹을 만한 찌개 국물에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게 돼 ‘퐁네프의 연인들’ 주인공의 원추각막 두번째로 각막은 눈의 가장 외부에 노출된 조직이기에 그만큼 눈을 지키는 든든한 방벽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특성을 지닌다. 일단 세균에 대한 저항은 눈물 속에 든 다양한 항균 물질이 각막을 늘 적셔줌으로써 일차적인 대비를 해 둔 상태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유리창이 깨지기 쉽듯이 각막 역시도 그다지 튼튼하거나 질긴 조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각막이 취한 전략은 ‘효과적인 경보 전략’이다. 대개의 가정집에도 외부 침입자들에 대비하기 위한 경보장치는 주로 창문에 설치한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도둑이라면 벽을 뚫기보다는 유리창을 깨는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경보 장치는 비록 유리창이 깨지는 것을 막지는 못하지만, 침입자가 더 이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각막에는 아주 미세한 자극도 감지하고 반응하는 통각신경의 말단들이 무수히 존재하는데 이들이 눈의 경보장치로 작용한다. 이들은 매우 예민해서 티끌 하나, 먼지 한 톨의 자극에도 재빠르게 반응해서 통증을 느끼게 한다. 피부에는 한주먹씩 문질러도 아프지 않은 고운 모래알이 단 하나만 눈에 들어가도 극한의 고통이 느껴진다든가, 입안에서는 먹을 만하던 매콤한 김치찌개 국물이 눈에 튀면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유리창이 왜곡 없이 외부 풍경을 내부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유리창의 두께가 균일해야 한다. 한쪽은 두껍고 한쪽은 얇다면 풍경이 어딘가 일그러지기 마련이니까. 이 점에서 각막은 이 원칙과 맞지 않는 듯하다. 각막은 가운데가 좀더 얇고(0.4㎜) 가장자리가 두꺼운(0.6㎜) 모양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얼핏 이는 좋은 유리창의 조건과 맞지 않는 듯하지만, 눈의 모양이 집의 외벽과는 달리 구형(求刑)이라는 것을 인식하면 이는 필요한 구조다. 비록 각막은 두께는 균일하지 않으나 두께의 비율은 일정해서 상이 이지러지는 것을 막아준다. 이 두께의 비율이 깨지는 순간 문제가 일어나는데, 대표적인 현상이 원추각막이라는 증상이다. 원추각막은 원래는 완만한 곡면인 각막이 원뿔처럼 튀어나오는 증상을 보이는 질환으로, 각막 중앙 부분이 얇아지는 것이 원인이다. 각막의 중앙이 얇아지면 이 부위가 늘어나는데다가 내부 압력 등으로 인해 뾰족하게 튀어나오게 되는데, 이러한 각막의 모양 변화는 방치하면 시력이 저하되고 심하면 실명할 수도 있지만, 적절하게 발견해 치료하거나 심할 경우에는 각막 이식을 받으면 다시 시력 회복이 가능하다. 오래전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의 주인공 미셸(쥘리에트 비노슈)은 화가였으나 점점 나빠지는 시력에 실명의 위기에 놓여 절망하게 되는데, 그녀의 눈에서 색을 앗아간 질병이 바로 점점 뾰족해지는 눈, 즉 원추각막 증상이었다. 그래서 영화 말미에 그녀는 다시 시력을 되찾고 눈이 안 보일 때와는 달리 매우 깨끗해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여기 두살 때 사고로 시력을 잃은 여성이 있다. 온통 암흑 속에 갇힌 듯한 그녀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비친 것은 그녀가 스무살이 되던 해였다. 누군가가 기증한 각막을 이식받을 기회를 얻게 된 것. 빛만 되찾으면 세상을 다시 얻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식을 받은 뒤 그녀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영상들이 비치고, 거울에 비치는 모습조차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끔찍한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곧 깨닫는다.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에게 각막을 기증한 망자가 보았던 장면이라는 사실을. 죽은 이 것으로 바꾸면 낯선 영상이? 2002년 개봉된 타이(태국) 영화 <디 아이(눈)>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이 영화에서 소재로 삼은 각막 이식을 통해 죽은 자의 기억과 시야가 전이된다는 이야기는 공포 장르에서는 꽤 매력적인 소재인 듯하다. 같은 제목의 리메이크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면 말이다. 현재까지 눈에서 이식될 수 있는 부위는 눈 전체가 아니라, 직경 1㎝ 남짓의 얇은 각막뿐이다. 눈이라는 집 전체가 아니라 유리창만 갈아 끼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막 이식을 받는다고 해서 기증자의 기억과 시야가 전달되는 것은 단지 영화적 상상력일 뿐이다. 다만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을 보거나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을 보는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지만, 내 눈에 보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 또한 곤란하다는 사실도.(물론 영화의 주인공은 전자 쪽에 속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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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과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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