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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01 09:25 수정 : 2014.10.21 10:15

윤해서 소설 <커서 블링크> ⓒ이현경



윤해서 소설 <1화>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놓인 불의 다리
존재와 비존재의 끊임없는 공존이여

―로제 아슬리로, <불완전한 시>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아침.

나는 1년의 절반은 해가 점점 짧아지다가 나머지 절반은 해가 점점 길어지는, 신기한 도시에서 태어났다. 해가 짧아지거나 길어지거나. 살다 보니 신기한 것은 거의 사라지고 욕망과 추억이 버려진 묘지에 웃자란 잡풀처럼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잡풀이 봉분을 뒤덮고 비석을 가리고, 그 자리에 묘가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추었다. 봄이 가고 구름이 무거워졌다. 어느 날 비는 원망 조로 내렸다. 어느 날 비는 푸념 조로 내렸다. 몇 날 며칠. 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해가 무섭게 내리쬐는 여름이 몇 해 지나갔다. 단풍은 어느 때나 축복이었으나. 점점 무성해지는 잡풀들. 뿌리를 깊이 박고 억세게 넝쿨을 늘려가는 잡풀들 아래. 땅속 깊이 관 하나가 놓여 있다는 것을, 사람 하나가 두 다리를 뻗고 잠들어 있다는 것을 잊었다. 작정하고. 무작정 사는 동안. 욕망과 추억이. 놀라운 생명력과 끈질긴 번식력으로 충동과 충돌, 사랑과 환멸, 그리움과 서러움의 시간들을 완전히 뒤덮기 시작했을 때.

내가 처음 가려고 했던 곳은 호수의 동쪽, 작은 마을이었다. 여행객들이 많지 않은 동부 호안을 따라 호수의 북쪽 끝까지 가려는 여정의 첫 목적지였다. 지프로 보름 이상 달려야 호수의 북쪽 끝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작은 공항이 있는 시내에서 바퀴가 큰 검은색 차를 한 대 빌렸다. 포장된 도로는 시내에서 벗어난 지 두 시간쯤 됐을 때 끊겼다. 울퉁불퉁한 자갈길과 굴곡이 심한 진흙탕길을 지났다. 크고 작은 양 떼가 길을 가로질러 초원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자주 차를 멈춰 세우고 새끼 양들이 어미 양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양들이 무심하게 차 앞을 지나갔다. 끝없는 하늘과 땅, 드문드문 뜬 흰 구름들과 초원 위의 양 떼가 전부였다. 나는 계속해서 거의 같은 풍경 속을 달리고 있었다. 어디쯤 달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먹구름의 안쪽에 들어서면 비가 세차게 내렸다. 구름 그림자가 구릉 위에, 들판에 떠 있었다. 무지개가 광막한 초원을 가로질러 걸려 있었다. 세 시간여 동안 한 대의 오토바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 차를 앞질러간 것이 전부였다.

나는 오른쪽 숲으로 이어지는 길로 꺾어져 들어갔다. 지도에 따르면 그 숲길을 통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행자 안내소가 있을 것이었다. 호수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마치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진 호수. 호수에 이는 잔잔한 물결. 맑은 물 위에 그대로 비치는 파란 하늘과 붓질을 해놓은 듯한 구름들. 호수에 깃든 고요와 적막 같은 것들을 나는 상상하고 있었다. 숲에 들어섰을 때 반쯤 열어둔 창으로 향긋한 바람이 불어왔다. 새소리가 들렸다. 처음 들어보는 새소리였다. 나는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카메라를 꺼내들고 내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새가 다시 한 번 울기를 기다렸다. 고개를 들어 주변의 나무들과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았다. 바람에 잎들이 가볍게 흔들렸다. 가까운 나무 꼭대기, 가느다란 가지 끝에 아주 작고 새까만 새가 앉아 있었다. 나는 카메라 셔터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포르르. 새가 날아올랐다. 숲의 끝은 멀리 호수가 보이는 내리막길의 시작이었다. 하늘과 호수가 맞닿아 멀리 보이는 호수가 하늘 같았다. 찰칵. 나는 다시 한 번,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고 다음 순간 카메라에서 눈을 뗐을 때. 하늘에서 뭔가 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환영처럼.

갑자기. 그것은 반짝거렸고 가볍게 흩날렸고, 흩어지다 사라졌다. 그것은 익숙한 도시의 겨울, 꽁꽁 언 밤을 하얗게 밝히던 눈도 후득후득 떨어져 어느새 창을 따라 흘러내리던 빗방울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닥을 적시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잘게 부서진 은빛 연두. 빛 속에서 빛나는 빛. 빛 아래 빛으로 부서지는 빛. 스치듯 어떤 향이 느껴졌다. 주변을 은은한 박하 향이 감싸고 있었다. 숲의 한가운데.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먼 하늘에서. 반짝이는. 점들. 아주 짧은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멀리 있던 별들이, 먼 우주에서 오래전에 사멸한 별들이.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온 느낌이었다. 하늘이 완전히 우주를 향해 열린 것 같은 느낌. 흩어진 몇 개의 점들로 보이던 별들은 이제 하늘의 절반 이상을 채웠고 박하 향은 선명하게 짙어졌다. 나는 고개를 들고 한참을 서 있었다. 내가 한낮의 별들 사이로 쏟아져 내리고 있는 기분일 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은 다 그렇지.

나는 갑작스러운 사람 소리에 놀라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보는 눈. 양쪽 눈동자 색깔이 확연히 다른 여자였다. 한쪽은 검정에 가까운 초록이었고 한쪽은 옅은 회색이었다. 투명한 눈동자 안쪽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뭔가에 눈이 부셔 순간적으로 고개를 숙였는데 그 순간, 뜬금없이 문학수가, 학수에게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윤해서(소설가)





윤해서

2010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단편소설 <최초의 자살>이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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