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해서 소설 <2화>
아치
부탁할게.
학수가 공책을 내밀며 말했다.
정해진 주제로 글짓기를 하는 숙제였는데 학수는 아직 글자를 쓸 줄 몰랐다. 우리는 열세 살이었고 학수와 나는 6년째 같은 반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학수와 짝이 된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고 나는 사실 일주일 전까지 학수와 같은 반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학수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을 때 학수가 말했다. 너 모르지? 우리 6년째 같은 반이야. 나는 당황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수에게 점점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그때 어떤 식으로든 미안한 마음을 덜고 싶었을 것이다. 학수의 공책 위에 글씨를 최대한 예쁘게 쓰려고 노력하면서 학수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시끄럽게 떠드는 교실이었다. 학수는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고 학수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작은 섬이야.
작은 섬이야. 섬의 작은 언덕에는 오두막집 몇 개가 있어. 거기 가난한 소년과 소녀가 살아. 폭풍우가 치는 날이 많은데 바람이 너무 세게 부는 날은 파도가 소년과 소녀가 살고 있는 집을 덮칠 것 같아. 비가 퍼붓고 천둥 번개가 치면 소녀는 울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거야. 소년은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일찍 자리를 펴고 눕지. 동생을 꼭 안고 있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더운 숨을 훅훅 내쉬어. 답답하지만 꾹 참아. 오빠니까. 소녀는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어. 소녀는 엄마, 아빠 꿈을 꾸고 싶은데 그런 꿈은 꿀 수 없어. 한 번도 엄마, 아빠를 본 적이 없거든. 그러던 어느 날 이 가난한 소년, 소녀에게 무서운 뱃사람들이 찾아와. 뱃사람들은 소녀를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지. 소년은 펄쩍 뛰어. 세상에 둘밖에 없는데. 소년은 절대로 동생을 빼앗기지 않을 거라고 다짐해. 주먹을 꼭 쥐고 동생에게 말하지. 오빠가 지켜줄게. 오빠가 지켜줄 거야. 소년은 이른 새벽, 아직 해도 뜨지 않았을 때 소녀의 손을 잡고 달려. 달이 밝아서 아이들이 달리는 모습이 섬의 어디에서나 잘 보이지. 두 아이는 한참을 달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소녀가 더는 못 가겠다고 할 때까지 소년은 멈추지 않아. 아주 멀리 왔다고 생각하지. 아무도 여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둘은 마을 뒷산 큰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어. 해가 뜨고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해. 소년과 소녀는 꾸벅꾸벅 졸아. 너무 일찍 일어난 데다 힘들게 달렸던 거야. 졸다 깬 소녀가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리는 바람에 소년도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깨. 동생을 달래지. 조금만 참아. 조금만. 밤이 되면 내려가자. 밤이 되면 다 좋아질 거야. 소녀가 칭얼거리고 울다 지쳐 잠들기를 반복하는 동안 정말로 밤이 와. 해가 지고 어두워지니까 마을이 고요해져. 가끔 풀벌레 소리만 들려와. 소년은 소녀의 손을 꼭 잡고 나무 뒤에서 나오지. 오솔길을 조심조심 내려와. 달이 밝아서 소년이 소녀의 손을 잡고 오두막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섬 어디에서나 잘 보이지. 오두막으로 돌아온 소년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걸쇠에 숟가락을 꽂아. 그제야 방바닥에 남아 있는 감자가 눈에 들어오지. 어둠 속에서 소녀가 허겁지겁 삶은 감자를 먹고 있어. 소년은 등불을 밝힐 생각도 못 하고 소녀를 데리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날이 더워서 몸이 땀에 젖었지만 소년은 한겨울에나 꺼내 덮는 제일 두꺼운 이불을 꺼냈어. 이제 다 괜찮아. 소년이 이불을 소녀의 턱 끝까지 덮어주면서 말해. 두 아이들의 배 속에서 번갈아 꼬르륵 소리가 나서 아이들은 배가 고픈 것도 잊고 서로 마주 보고 웃고 말지. 오늘 처음으로 웃은 거야. 소년과 소녀는 너무 지친 나머지 금방 잠 속으로 빠져들어. 소녀의 손을 잡고 있던 소년의 손에 힘이 풀려서 아이들의 두 손은 헐겁게 연결되어 있어. 이제 막 맛있는 쌀밥을 한 숟가락 입에 떠 넣으려는 찰나인데. 뭔가가 소년의 팔을 잡아당겨. 차갑고 미끌거리는 거. 차갑고 미끌거리는데 힘이 아주 센 뭔가가 소년의 팔을 자꾸 잡아당기는 거야. 끈적거리고 기분 나쁜 악력이 소년의 앙상한 팔을 휘감고 있어. 소년은 악몽에서 깨어나면서 팔을 흔들어. 팔을 빼내고 싶거든. 그런데 차갑고 끈적한 것에 휘감긴 팔이 꿈쩍도 하지 않아. 소년은 눈을 번쩍 떴지. 그리고 보았어. 한 팔이 뱀인 남자가 뱀의 머리를 소녀의 얼굴 가까이 들이밀고 있었지. 뱀의 혀로 소녀를 위협하면서 나머지 한 손으로 소녀의 입을 막고 소녀 위에 올라타 있었어. 남자와 눈이 마주쳤지. 소년은 너무 무서워서 오줌을 지렸어. 어제 왔던 뱃사람들 중 한 명인 것 같기도 했고 처음 보는 얼굴인 것 같기도 했어. 소년은 남자를 당장 소녀에게서 떼어내고 싶었지만 그 좁은 방 안에 어떻게 그렇게 큰 문어가 들어왔는지. 소년과 남자, 소년과 소녀. 그들 사이에는 엄청나게 거대한 문어가 수많은 다리를 꿈틀거리고 있었어. 소년의 팔은 이미 문어의 다리에 꼼짝없이 휘감겨 있었지. 소년은 두려움에 떨었어. 눈물을 흘렸는데 너무 무서워서 소리는 나오지 않았어. 눈물과 땀으로 온몸이 범벅이 되었지. 소년의 몸부림은 아무 소용이 없었어. 소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 그리고 아주 잠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거 같은데. 소녀는 남자에게 끌려나갔는지 남자도, 소녀도 보이지 않았어. 좁은 방 안에는 문어와 소년뿐이었지. 그렇게 거대하던 문어는 온데간데없고 소년의 작고 여린 주먹만 한 머리에 앙상하게 마른 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보잘것없는 문어가 소녀가 누워 있던 자리에 놓여 있는 거야. 쭈글쭈글한 문어의 낯짝을 보자 소년은 참을 수 없었어. 소년은 죽기 살기로 문어에게 덤벼들었지. 반짇고리를 뒤져 다리에 녹이 슨 커다란 가위를 찾아냈어. 알 수 없는 소리를 꽥꽥 지르면서 문어를 공격하기 시작했지. 문어는 너무 작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소년의 몸이 바닥에 부딪히면서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들었어. 소년은 가위로 문어를 난도질하기 시작했어. 소년의 손끝에서 문어는 잘려나갔지. 소년은 문어의 머리를 정확하게 반으로 갈랐어. 문어의 머리를 몇 번이고 잘랐지. 몇 조각으로 잘려 흩어진 문어의 다리들을 보면서 소년은 계속 분노에 떨었어. 그리고 곧 깨달았지. 소녀를 잃었다는 것을. 소녀가 영영 사라졌다는 것을. 소년은 방문을 열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어. 엉엉 울기 시작했지. 엉엉 울다가. 엉엉 울면서 소녀는 잠에서 깨어났어. 잠에서 깬 소녀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방을 둘러보았지. 문어도, 남자도, 소년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불은 펑 젖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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