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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서 소설 <커서 블링크>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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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서 소설 <3화>
갑자기 깨달아질 때가 있다
눈이 내리지 않는 나라의 사람이 겨울을 꿈꾸듯.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정오의 태양은 하늘 높이 떠 있었고 더는 아무것도 내리지 않았다. 양쪽 눈동자의 색이 다른 여자는 마치 나에게 말을 걸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이미 저만치 떨어져 숲 속으로 휘적휘적 들어가고 있었다. 학수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나는 갑자기 떠오른 학수와 학수의 이야기를 오래 생각하고 있을 수 없었다. 잿빛 뒷모습의 여자가 방금 어떤 언어로 나에게 말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 우리말은 아니었는데. 내가 그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뭔가에 잠깐 홀린 기분이었고 박하 향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이상한 숲을 빨리 빠져나가고 싶어졌다. 차에 올라탔다. 카메라를 조수석 위에 올려놓고 시동을 걸었다. 나는 숲길을 빠져나가면서 반대쪽 숲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는 잿빛 여자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뜻밖에도.
몇 시간 뒤, 내가 도착한 곳은 올리브 나무가 자라는 작은 마을, 로드하라였다. 로드하라는 이름만에 위치한 작은 섬이라고 했다. 물론 로드하라는 내가 처음 가려고 했던 호수의 동쪽 마을은 아니었고. 내가 바다 같은 호수라고 알고 달려온 호수는 바다였다. 로드하라는 육지에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작은 섬이라고 했다.
다리를 지나온 적이 없는데요.
나는 호텔 주인에게 물었다. 엉뚱한 마을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계속 어리둥절해 있었다.
무성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니까.
주인이 말했다.
나는 뭔가 더 묻고 싶었지만. 이를테면. 만에 섬이 위치한다는 게 말이 되는지. 다리 위에 그렇게 무성한 숲이 자랄 수 있는지 같은 질문들. 하지만 그렇게 미심쩍은 상태로 로드하라를 받아들였다. 사실 긴 운전으로 너무 지쳐 있어서 더는 운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길 끝에서 호텔을 발견했을 때 무작정 차를 세웠던 것이다. 호텔은 로드하라의 초입에 있었고 바닷가에 잇닿은 비탈면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짐을 풀고 호텔 앞 정원에 내려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섬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호텔 아래쪽으로 붉은 색깔의 낮은 지붕들이 계단식으로 펼쳐져 있었다. 호텔의 앞쪽에는 간판이 없었고 울타리 안쪽에 나비 모양의 잎을 달고 있는 나무들이 많았다. 나뭇잎들이 작게 흔들렸다. 완전한 어둠이 내리기 전이었는데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을 더해가는 검푸른 저녁 하늘 위로 번지는 낮은 종소리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밤이 깊고 종소리가 그치자 적막이었다. 밤과 밤바다와 적막. 바다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파도 소리. 그게 전부였다. 한참,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밤늦게 비가 내렸다.
해가 뜨기 전의 마을은 전날 오후의 마을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아직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골목은 조용했다. 거리의 개들이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거나 배를 깔고 엎드려 있었다. 몇 개의 골목을 지나쳤을까. 특이한 구조의 집들을 올려다보다가 나는 길 끝에 있는 문 앞에 멈춰 섰다. 해는 높이 떠올랐고 더는 앞으로 갈 수 없었다. 사람이 드나들기에는 조금 작은 문, 막다른 길에 푸른 문이 길을 막아섰는데 작은 기차역 앞이었다.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기차역 앞에 로드하라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고 흰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처음 보는 꽃이었다. 허공에 흰 물감이 잘게 떨어져 번진 것처럼 꽃의 줄기가 보이지 않았다. 푸른 문을 달고 있는 돔 모양의 작은 역사 뒤로 짧은 철로와 두 량의 빨간 기차가 보였다. 운행을 하는 기차는 아니고 기차 모형의 카페 같았다. 기차가 다니지 않는 마을에 철로 모형의 철로와 기차 모형의 기차가 있다니. 왠지 로드하라에는 없는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푸른 문이 열렸다. 챙이 큰 모자가 불쑥 나타났는데 인도계로 보이는 눈이 크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허리를 숙이고 좁은 문을 빠져나온 여자는 생각보다 키가 몹시 작았다. 나는 마치 작은 인형 같은 여자의 얼굴을 힐끗 보았고 여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여자가 웃어 보였다. 나는 여자가 나와 같은 여행자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안도했다. 로드하라에서 만난 첫 번째 여행객이었다. 나는 나와 같은 여행객이 있다는 사실에 왠지 마음이 느긋해져 여자가 골목을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그 골목을 천천히 돌아 나왔다.
나는 압사했네.
그래 압사했지. 분명히 압사였어. 아주 오래전이지만 기억이 나.
물론 뜻밖의 일이었어. 그래 뜻밖이었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하는 말이 다 그렇지. 다 그렇듯. 무의미한 말일세.
그런데 자네는 무엇을 포기했나?
골목을 돌아 나오다가 기차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좌판을 펼치고 있는 노인을 보았다. 마치 나를 향해 말한 것 같았는데 골목 끝에 앉은뱅이 의자를 깔고 앉아 있던 눈이 움푹 꺼진 남자가 말했다.
미친 노인네야.
남자 앞에 낡은 구두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미치기 전엔 유명한 배우였다는 말도 있긴 한데. 그것도 떠도는 말이니. 어디 믿을 수가 있나.
미치다니! 미치긴 누가 미쳐.
노인은 말하지 않았다. 남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들리지 않는 척 연기를 하는 건지. 노인은 주어진 대사를 다 말해버린 배우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에게 남은 연기는 잠자코 콩을 파는 것이라는 듯. 좌판에 볶은 콩만 펼쳐놓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연기. 두 사람의 모습은 연극의 한 장면 같았다. 나는 이 둘이 같은 장면을 여행자들을 향해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서 연기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는 당신은 무엇을 견디고 있습니까. 노인에게 묻고 싶었지만. 곧. 연기라면. 학수의 연기가 볼만했는데. 라는 생각과 동시에 다시 학수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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