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10.07 09:21 수정 : 2014.10.21 10:16

윤해서 소설 <4화>



체념력

학수는 검은색 반바지에 소매가 긴 흰 셔츠를 입고 한참 유행 중인 서스펜더를 착용하고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우연히 두 번 학수를 만났는데 그날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학수를 만난 날이었다. 집 근처 강가에 있는 쇼핑몰이었는데 한 매장 앞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멈춰 서 있었다. 나는 다음 날 면접 때 입을 검은색 정장을 사기 위해 여러 매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멈춰 서 있는 매장에 유난히 키가 큰 마네킹이 서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피해 그 매장 앞을 지나쳐가다가 마네킹을 힐끗 돌아보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마네킹처럼 서 있는 마네킹은 사람이었는데 낯이 익었다. 문학수.

나는 학수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했다. 그사이 키만 훌쩍 자랐는지 학수는 어릴 때 얼굴 그대로였다. 소처럼 선한 눈에 까무잡잡한 피부, 두툼한 입술. 나는 사람들이 자리를 뜨기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매장 앞에 학수와 나. 둘만 남았을 때, 나는 학수에게 물었다.

힘들지 않아?

학수보다 키가 한참 작은 나는 고개를 바짝 들고 있었고 학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았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고 무게중심을 오른 다리에서 왼 다리로 옮기지도 않았다. 줄곧 한곳을 응시하고 있는 학수의 눈에는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학수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못 알아보는 걸까? 학수가 아닌 걸까? 초조해지려 할 때 학수가 대답했다. 그럭저럭.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지. 학수의 말과 동시에 불꽃이 터졌다. 눈부신 은색 불꽃이 하늘에서 점점이 흩어졌다. 10년 만에 만난 학수는 여전했다. 어쩔 수 없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냐? 뭘 어쩔 수 없는데? 남자애들이 수없이 시비를 걸 때도 학수는 빙긋이 웃었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에. 다리 위에서 커다란 원을 이룬 불꽃은 두 번의 폭발을 거치며 다섯 개의 작은 원으로, 아주 작은 불씨들로 흩어지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고개를 들고 이제 막 피어오른 새빨간 불꽃을 올려다보며 걷는 사람들의 무리가 학수를 못 보고 지나치는 바람에 학수는 그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부딪혔다. 나는 팔을 뻗어 학수의 손을 잡아당겼다.

10년 만에 만났는데 밥이나 먹을까? 저기서 기다릴게.

나는 초점 없는 학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학수가 일하는 매장 맞은편에 있는 카페에서 쇼핑몰의 폐장시간까지 기다렸다. 학수는 훌륭했다. 몇 시간 동안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내가 왜 무작정 학수를 기다렸는지. 학수가 왜 아무 대답 없이 나를 따라 강가까지 걸어 나왔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 우리 머리 위에서 터지던 불꽃이 너무 화려했기 때문에. 10년 만에 만난 우리가 계속해서 불꽃이 터지는 강가를 걷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나는 이리저리 휘둘리는 학수의 손을 좀 더 힘껏 잡아당겼다. 그때 학수가 나를 보고 빙긋 웃었던가. 나는 학수의 표정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또 한 번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고 이어 붉은 불꽃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하늘 가득 피어오른 붉은 불꽃이 일제히 무수한 포물선을 그리며 쏟아져 내리는 광경은 한 번도 목격한 적 없는 우주의 대폭발을 연상하게 했다. 그즈음 어떤 폭발은 사람들의 내부에서 더 자주, 더 격렬하게 일어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불꽃놀이에 비하면 우주의 폭발만큼이나 고독하고 고요한 폭발이었다.

어떻게 지냈어? 내가 학수에게 물었다. 그럭저럭.

너는? 학수가 물었다.

나도 그럭저럭. 아직 저기 살아?

강가에 서 있는 오래된 아파트를 가리키며 내가 물었다.

응. 너는?

나도. 한동네에 계속 살았는데 어떻게 한 번을 안 마주쳤을까. 신기하네.

그러게.

학수는 또 빙긋이 웃었다.

10년 만이었지만 우리는 별로 말이 없었다. 어제 만나고 오늘 만난 것처럼. 무덤덤했고 편안했다.

이제 좀 무서운 거 같아.

내가 말했다. 뭐가? 라고 학수는 묻지 않았다.

5년쯤 됐나? 아닌가? 1년은 더 된 거 같은데.

내가 말했다. 뭐가? 라고 학수는 묻지 않았다.

그때, 머리 위에서 새로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주황색 불꽃이 하늘에 열매를 맺듯 크고 작은 둥근 원들로 피어올랐다. 학수와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주황색 불꽃이 터지는 하늘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우리 무슨 얘기 하고 있었지? 내가 물었다.

학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

요즘은 뭐든지 금방 잊게 돼. 심지어 막 화를 내고 있다가. 엄청 화가 났었는데. 내가 왜 화가 났었는지를 까먹는다니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아무 생각도 오래 할 수가 없어. 이러다 진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거 아닐까. 심각해. 심각하게 멍청해. 점점 더 멍청해지는 거 같아.

괜찮아. 그렇게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어.

학수가 괴로워하는 나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뭐가 괜찮은데? 뭐가 중요하고 뭐는 중요하지 않은데? 나는 학수에게 계속 뭔가 더 묻고 싶기도 했고. 앞으로 학수를 가끔은 만나게 될 것 같기도 했다. 불꽃놀이는 몇 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는 날을 제외하고. 불꽃을 잘 볼 수 있는 강가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수는 줄었으나 하룻밤에 터지는 불꽃의 수는 오히려 는 것 같았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나는 학수의 말을 떠올리며 불꽃이 사라진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잠깐의 암흑, 위로 초록과 보라가 은은한 조화를 이룬 긴 띠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따라. 나는 아주 작은 불꽃과 더 작은 불꽃이 만들어내는 초록 은하수 위에 선명하게 피어나는 보랏빛 불꽃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자꾸 바라보게 돼. 불꽃이 터지니까. 자꾸 터지니까.

어쩔 수 없는 걸까. 정말 어쩔 수 없는 게 맞을까. 나는 불꽃들이 잘게 흩어지며 사라지고 있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학수는 뭘 어쩔 수 없다는 거였더라. 생각이 나지 않았다. 화려하게 색을 갈아입는 불꽃, 불꽃, 불꽃들. 10년 만에 만난 학수는 여전했고 여전히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펑, 펑, 펑. 끝없는 폭발과 점멸이 있을 뿐이었다.




한겨레출판 문학웹진한판 바로가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윤해서의 <커서 블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