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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08 09:49 수정 : 2014.10.08 09:49

윤해서 소설 <5화>



달리는 것, 달리는 사람

너는 다른 아이들처럼 왜? 그건 왜? 그러는 법이 없었어. 단 한 번도.

이게 뭐야? 이건 뭐야?

이건?

이건?

그렇게 묻고는 그만이었지. 아주 아기일 때부터. 그저 끄덕거리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하지 마. 학수야. 그렇게 하면 안 돼. 학수야 그건 안 돼.

그러면 그렇게 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거나. 또 그걸로 그만이었지. 네가 아주 좋아하는 뭔가를 못 하게 해도. 왜 하면 안 되는지 묻지는 않고. 나를 그냥 빤히 봐. 엄마는 그게 무서웠다. 내가 거기 없는 것처럼. 너무 빤히, 언제나 나를 빤히 보기만 하는 네가 무서웠어.

무서웠다.

학수의 엄마가 세상을 떠나면서 학수에게 남긴 유일한 유언이었다.

학수는 끝까지 왜 아버지가 없는지 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았다. 학수에게 무서웠다는 엄마의 말과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한 채가 남았다.

왜 태어난 걸까? 왜 살지?

넌 왜 사냐?

막 수염이 자라기 시작할 때쯤이었던가. 처음으로 자위를 한 다음 날 아침이었던가. 학수의 친구가 물었다.

왜라니?

학수는 사람들이 왜, 왜라는 말을 그렇게 많이 하는지 묻지 않았다. 학수에게 세상은 딱히 궁금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곳이었다. 나는 태어났고, 살고 있고, 아직 살아 있다. 그것 외에 또 뭐가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물론 이조차 학수의 생각은 아니었지만. 오직 살아 있음. 그것 외에 학수는 별생각이 없었다.

야, 닥치고 밥이나 먹자.

왜 태어난 걸까?

넌 왜 사냐?

왜 살아야 되는 거야? 묻던 친구의 말에 학수가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다른 한 친구가 두 사람의 뒤통수를 치며 말했고, 학수와 학수의 친구와 학수의 친구의 또 다른 친구는 닥치고 밥이나 먹었다.

나는 왜 이렇게 어리석은가?

왜 나는?

왜 나에게?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너 나한테 왜 이래?

왜?

왜 그랬니? 왜 그랬어?

왜 그럴까? 왜 그래?

너는 왜?

네가 왜?

그게 왜?

그건 왜?

왜? 라는 고리 끝에 걸린 끝도 없는 질문들이 학수에게는 단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어떤 대상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질문이든, 습관적인 반응이든, 상황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든,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든. 왜, 나는 어떤 순간에도 왜라는 의문을 품지 않는가? 하는 질문조차도. 학수에게 왜란, 먼 나라의 뒷골목. 녹슨 갈고리 끝에 걸린 전혀 맛보고 싶지 않은 시뻘건 고깃덩어리 같은 것이었다.

거의 10년 뒤. 다시 우연히 학수를 만나게 될 때까지. 그리고 다시 10년 뒤. 학수의 목소리를 라디오에서 듣게 될 때까지. 나는 이런 사실들을 전혀 몰랐지만.

이제 내가 아는 한 학수는. 처음부터. 거의 처음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는. 아무도 아닌. 그였다.

아무도 묻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시절.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광장

어차피. 그래 어쩌면. 네 말대로. 우리는 빛이 아주 사라져버린 동굴 속에 있어. 그림자마저 사라진 어둠 속에. 얼마 남지 않은 암흑과 멀리서 끝없이 터지고 사라지는 불꽃. 펑. 펑. 펑. 볶은 콩을 한 봉지 사들고 로드하라의 다른 골목들을 헤매고 다니면서 나는 이렇게 계속 학수를 생각했다. 밤이. 밤마저 사라진 것 같아. 나는 그때의 학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다. 입 속에 콩을 한 주먹 넣고 턱이 아플 때까지 씹었다. 그때의 학수는. 그때의 나처럼.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겠지만. 학수는 지금쯤 어디 있을까. 얼마나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지 나는 내가 중앙 광장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콩을 너무 열심히 씹느라 걷고 있다는 생각을 잊었는지도 몰랐다. 바닥을 보며 걷고 있었던 것 같은데 눈앞의 돌무더기가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엄청난 무더기가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돌무더기인 줄 알았던 그것은 가까이에서 보니 살아 있는 무엇 같았다. 쿵쾅, 쿵쾅. 심장이 몹시 뛰었다. 심장, 심장, 심장들. 나는 그 돌무더기로 보이는 검붉은 덩어리들을 보는 순간, 심장을 느꼈다. 누군가 내어놓은 심장 무더기. 물가에, 산사 마당에, 불상 앞에 쌓여 있는 작은 돌탑들이 떠올랐다. 곧 무너질 듯한 위태로움으로 긴 세월을 견뎌낸 돌탑들. 어딘지 슬프고, 그래서 아름답다 생각했던 것들. 어쩌면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위해서. 숨을 죽이고 쌓아 올렸을 두근거림.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이 조심스럽게 쌓아 올려진 무수히 많은 돌탑들. 차곡차곡 쌓아 올린 거대한 심장 무더기를 보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나는 어제저녁 호텔에서 내려다봤을 때 보이지 않던 섬의 반대편까지 온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붉은 심장 무더기는 커다란 원형 광장의 한가운데 있었다. 나는 왠지 달아나고 싶었고 내가 빠져나온 골목이 어느 골목인지 찾고 싶었지만. 수없이 많은 골목들이 광장을 향해 뻗어 있어서 내가 어느 골목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골목은 광장을 향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선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보았다. 거대한 심장 무더기와 텅 빈 광장과 똑같이 생긴 수십 개의 골목 입구들. 그 한가운데 사람이라고는 나 혼자뿐이었다. 광장은 고요했다. 뜨겁게 내리쬐기 시작한 햇빛과 이따금 불어오는 바닷바람. 쿵쾅쿵쾅.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전부였다.

아침을 먹는 것도 잊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나는 몹시 배가 고팠다. 둘러보니 광장을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둘러선 식당과 카페들이 많았는데 모두 문이 닫혀 있었고 창이 없어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단 간판이 제일 눈에 들어오는 한 집을 향해 걸어갔다.

딱 맞춰 오셨네. 어서 올라가요. 어서.

식당 문을 열자 주인으로 보이는 살집이 좋은 여자가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반색을 하며 끌어당겼다. 나는 거의 여자의 살집에 밀려 비좁은 계단으로 밀어 올려졌다. 좁은 계단 끝에 천창이 열려 있었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계단은 곧장 건물의 옥상을 향해 나 있는 것 같았다.

옥상에 올라선 나는 깜짝 놀랐다. 광장에 서 있을 때 건물의 옥상들마다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광장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고, 분명 사람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건물의 옥상은 물론이고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건물의 옥상에 손님들이 가득 차 있었다.

손님을 위한 마지막 자리입니다.

턱시도를 입은 젊은 남자가 나를 의자가 광장을 향해 놓여 있는 구석 자리로 안내했다.

식당이며 카페들은 모두 빈자리가 없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았는데 종업원으로 보이는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맥주 한 잔과 샌드위치를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내가 앉아 있는 식당의 옥상을 둘러보았다. 아침에 보았던 챙이 큰 모자가 올려져 있는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이었다. 여자가 맥주를 마시며 이따금 한 번씩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혼자였다. 나는 모든 테이블에 의자가 한 개씩만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광장을 내려다보는 사람도 있었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도무지 이 사람들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여자에게 말이 걸어보고 싶었고 갑자기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고 처음이었다. 외로운가. 생각하자 또다시 학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10년 뒤, 학수를 두 번째 만났을 때, 학수는 지하철역에 서 있었는데.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주변에 은은한 박하 향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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