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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13 09:32 수정 : 2014.10.21 10:17

윤해서 소설 <커서 블링크> ⓒ이현경



윤해서 소설 <7화>



느닷없이 사랑하고 싶은 날

어쩌면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순간이었다. 주변에 박하 향이 짙게 감돌고 하늘에서 작은 은빛 연두들이 흩날리기 시작했을 때. 작은 별들이 거의 자욱하게 하늘을 뒤덮었을 때. 심장 무더기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을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는지 한 사람이 단 하나의 심장을 집어 들었을 뿐인데 그 거대하고 붉은 무더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골목에서 빠져나와 심장을 하나씩 집어 들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골목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앞에 있던 엄청난 심장 무더기는, 광장 한가운데 있던 심장 무더기는 사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건물들보다 높았다. 옥상에서도 올려다보아야 했던 그 거대한 심장 무더기가 순식간에 흩어지는 것도 신기했지만. 무엇보다 하늘에서 내리고 있는 눈도 비도 아닌 것들. 반짝거리며 공중에 흩어지고 있는 것들. 어디에도 내려앉지 않고 손으로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 것들. 내가 아는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또 순식간에 흩날리다, 사라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지. 이 상황을 모두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 나는 몹시 궁금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옥상에 사람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텅 빈 옥상에 홀로 서 있었고 옆 건물, 그 옆 건물 옥상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챙이 커다란 모자를 쓴 여자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심장 하나를 받쳐 들고 빠른 걸음으로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숲에서 만났던 양쪽 눈동자의 색깔이 다른 여자. 잿빛 뒷모습의 여자로 보이는 여자들은 너무 많아서 그 많은 잿빛들 중 어느 잿빛이 그녀의 잿빛인지 알 수 없었다. 골목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은 어디쯤일까. 나는 내가 호텔이 있는 섬의 비탈면 반대쪽에 와 있다는 것도 잊고 혼자 구경꾼으로 남은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 계속해서 눈으로 호텔을 찾았다.

저 실례지만. 접시를 치워도 될까요?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물었다.

나는 남자의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평범한 갈색 눈동자였다.

방금 전에. 그러니까 방금 전에.

나는 뭔가 묻고 싶었는데. 어떻게 물어야 할지. 무엇을 물어도 되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는 두려웠다. 테이블 끝에 내려앉았던 흰나비 두 마리가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낯설고 이상한 도시. 나는 최대한 빨리 호텔로 돌아가서 날이 어둡기 전에 이 도시를 떠나는 편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때 남자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우리말로는 혼이라고 합니다. 손님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나는 영어에 hon이라는 단어가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지금 이 남자가 우리말이라고 하는 로드하라의 언어가 영어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의 안심하라는 말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눈도 비도 아니지요. 그것은 이곳 로드하라에만 내립니다.

로드하라를 여행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혼을 보러 찾아옵니다. 정오의 태양이 광장을 뜨겁게 비출 때 혼은 내리기 시작합니다.

남자가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만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계산을 하고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왔다. 좁고 가파른 나무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구를 뻔했지만 살집이 많은 주인 여자가 나를 그 넉넉한 살집으로 받쳐주었다. 나는 푹신한 그녀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해서 광장으로 나왔다.

텅 빈 광장 한가운데.

나는 한동안 방향을 잃고 가만히 서 있었다. 붉은 무더기가 사라진 광장은 더욱더 넓어 보였고 모든 골목의 입구는 똑같이 생긴 것 같았다. 어느 쪽으로 가야 호텔이 있는 섬의 비탈면으로 갈 수 있는지. 로드하라. 마을 입구의 주차장으로 갈 수 있는지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압사했네.

그때 내 그림자는 뺑소니차에 치인 주정뱅이처럼 길게 누워 있었지.

한평생 그랬어. 한평생이었다니까.

그럴 수 없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런데. 그럴 수 없지가 어쩔 수 없지가 되고 어쩔 수 없지가 그럴 수밖에가 되는 게. 그렇게 거지 같은 게.

물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맞아. 무의미한 말일세.

그때 멀리서 낯익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만 말이야. 시간이 몸에 흘러간 흔적을 남긴다는 게 신기하지 않나. 이 주름들을 봐.

그런데.

다시 보니 노인의 얼굴이 어딘지 학수와 닮은 것 같았다. 노인이 방금 전까지 어떤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노인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기를 기다렸지만. 노인은 또다시 이미 대사를 다 말해버린 배우처럼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다시 학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건 정말 학수가 지은 이야기였을까. 학수는 왜 그때 그런 이야기를 지었던 걸까. 그때 그 글짓기의 주제가 무엇이었던가. 나는 떠오르지 않는 단어를 떠올리고 싶었다. 어쩌면 학수가 했던 그 이야기 때문에 학수를 자꾸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학수는 기억하고 있을까. 지금쯤 학수는 어디 있을까. 나는 노인의 꽉 다문 두툼한 입술을 보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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