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해서 소설 <8화>
示
다시 10년 뒤. 학수를 다시 만났던 그해. 나는 백화점에서 텐트를 팔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백화점은 영등포에 있었는데 퇴근길에 대방역에서 미친 사람을 보았다. 신길역에서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내리고, 아무도 올라타지 않았다. 대방역에서 다시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내렸다. 한 사람이 올라탔던가. 창문으로 맞은편 승강장 끝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언뜻 보기에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한눈에 미친 사람. 미친 사람이라는 느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나는 생각했다. 저 사람은 왜 미친 사람 같은 걸까. 주위 시선을 무의식적으로도, 의식적으로도 의식하지 않기. 허공을 향해 뭔가 말하기. 비실비실 웃기. 커다란 손짓 발짓을 반복하기. 그리고. 또. 남자는 이 모든 행동을 거의 한꺼번에 하고 있었다.
문학수.
내가 남자의 얼굴에서 학수의 이름을 떠올렸을 때는 이미 전철이 출발한 뒤였다. 다음 날도, 다음 날도, 그다음 날에도. 나는 전철에 타면 문학수를 기다리는 기분이 되었다. 나는 거의 매일 같은 칸에 오르고 내렸다. 전철이 대방역에 진입하면 학수가 있는지 긴장이 되었다. 학수는 일주일 넘게 같은 역, 같은 자리, 같은 창 너머에 있었다. 같은 역, 같은 창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학수에게 다가가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학수를 두 번째 우연히 만났을 때 나는 혼자서만 학수를 보고 말았다. 학수가 미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그 남자가 학수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수도 있고.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창 너머, 승강장 끝. 그곳이 아닌 곳에서 그 남자를 다시 만났다. 한눈에 미친 사람. 그 남자는 연극 무대에 서 있었다. 한눈에 미친 사람을 연기하는 사람. 그는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미친 사람을 연기하기 위해 미친, 미친 사람인 척, 정신이 나간 척, 매일 같은 자리에서 연기 연습을 하던 사람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친 남자가 관객석 사이를 뛰어다니며 손을 내밀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관객들은 남자와 악수를 하며 반갑게 눈인사를 했다.
<메리 크리스마스>는 즐거운 상상으로 채워진 유쾌한 연극이었다. 죽은 사람들이 1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혹은 복수하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오는 이야기. 누구나 태어나고 한 번은 죽지만. 1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에는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을 찾아올 수 있는 다른 조건의 삶. 다른 조건의 죽음을 그린 연극이었는데 미치광이 남자는 줄곧 무대의 뒤편 정중앙에 서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미친 사람. 미친 연기는 훌륭했다. 사람들은 배경으로 서 있는 남자의 미치광이 연기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죽은 자들의 방문은 담담했고, 살벌했고, 애틋했다. 슬프고 아름다웠다. 즐겁고 소란스러웠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듯. 모든 사건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모든 발화가 끝났다. 배우들이 하나, 둘, 퇴장했다. 무대가 텅 비었다. 텅 빈 무대 위에 미치광이 남자만 남았다. 배경만 남았을 때 불이 꺼졌다.
암전.
흘러간 바람에 답하듯.
흩날리는 꽃처럼.
우리는 사라진 한철이었다.
암전. 가늠할 수 없는 예정된 암흑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마지막 대사. 연극의 마지막 대사는 메리 크리스마스였다. 미친 연기에 미친 배우. 문학수. 나는 속은 기분이었다. 뭔가 실망스러운 것도 같았고 혼자 알고 있던 어떤 비밀을 잃은 것도 같았다. 다음 날에도,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나는 퇴근길에 학수를, 미친 연기를 하는 연기자가 아닌 진짜 미친 학수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대방역을 지날 때마다. 전철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내리고 아무도 올라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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