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해서 소설 <9화>
비좁고 가파른 내가
그건 그렇고. 다시 몇 년 뒤. 운전 중이던 나는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뉴스 프로그램에서 쏟아지는 매일의 사건들을 참기 어려워서 채널을 돌리고 있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한 번도 없습니다.
학수의 목소리였다. 학수는 그사이 꽤 이름이 알려진 배경 전문 배우가 되어 있었는데 누군가 학수에게 또 그런 질문을 던진 모양이었다.
왜? 라고 물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요?
여자 아나운서가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아마도 저는 체념력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선천적으로 궁금한 게 없어요. 체념증.
어쩌면 질병일 수도 있겠네요.
거짓말.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미친놈.
학수는 한 시간 가까이 아나운서의 질문에 성의껏 대답했다.
어머니의 유언에 대해. 연애의 실패에 대해. 친구들의 놀림과 자신의 곤란함에 대해. 왜, 왜가 궁금한지 잘 모르겠다는 식의 답변으로 한 시간여의 인터뷰는 마무리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학수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다는 것을, 아주 중요한 사실마저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수와 처음 짝이 되었던 열세 살. 학수와 6년 동안 같은 반이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처럼.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더 나쁜 쪽이든.
맞아.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난 걸 수도 있지.
근데, 병신. 병신아 너 뭐가 그렇게 두려우냐?
나는 술에 취해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고 주워섬기다 키득거렸다.
하긴 아무 이유가 없을 수도. 꼭 어떤 이유가 있어야 되는 건 아닐 수도 있겠지. 그렇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아무것도 묻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데. 안 그래? 안 그런가? 그래 뭐 꼭 변하는 게 좋은 건 아닐 수도 있지.
근데 너 정말 한 번도 왜? 라는 의문을 품은 적이 없어?
미친. 세계가 저 불꽃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나는 오래전. 내가 학수에게 했던 말들만 드문드문 기억하고 있었다. 학수가 정말 내가 하는 어떤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지. 내가 학수의 반응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이제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모든 기억을 불꽃이 집어삼켰다. 꽤 오랫동안 짙푸른 바다색의 거대한 불꽃이 강 위에 떠 있었다. 기꺼이 모두를 삼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우리는 술집 창으로 비치는 불꽃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 같은 거대한 빛 무덤 앞에서. 나는 압도되었다. 나는 사라졌다. 그 순간, 세계는 부재했다. 시간과 공간은 삼켜졌다. 어둠은 증발했다. 그 순간. 누군가에게. 불꽃은 역사였고 예언이었다. 불꽃은 종교였고 죽음이었다. 불꽃은 선언이었고 악몽이었다. 동시에. 불꽃은 유산이었고 슬픔이었다. 불꽃은 열애였고 이별이었다. 불꽃은 무한이었고 순간이었다. 그러나 불꽃은 터지고 곧 사라졌다. 누구에게 무엇이었든. 순간, 먼지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누군가 사라짐을 기억하기 전에. 눈앞에 또다시 새로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쌍둥이 불꽃이었다. 똑 닮은 두 덩어리의 불꽃이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피어올랐다. 멀리서 환호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강가의 사람들은 더없이 화려한 불꽃 앞에 서 있었고 우리는 끝없이 터지는 불꽃과 무관하게 허기와 권태, 분노와 체념에 시달렸다.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저기 봐.
내가 새벽하늘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에서. 둥근 오렌지색 불빛 위로 가느다란 회청색 불꽃이 하늘을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불꽃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불꽃은 많은 것을 연상시켰다. 순간적인 충만함을 느끼게 했고 불꽃이 사라진 자리에 무한한 공허감을 남기기도 했다. 사실은 그게 어떤 감정이든 미처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 곧 새로운 불꽃이 솟아올랐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별을 본 게 언제였지? 헤어지기 전에. 술집 앞에서 술에 취한 내가 물었다. 나는 학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고 학수는 대답 없이 또 한 번, 빙긋이 웃었던가. 푸른 새벽빛으로 밝아오는 하늘. 위로.
펑. 펑. 펑. 또 다른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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