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해서 소설 <10화>
탈구
그런데. 학수는 지금쯤 어디 있을까. 무심히 돌아가고 있는 시곗바늘에 깊이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다시는 말할 생각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는 노인을 뒤로하고 걷기 시작했다. 노인과 구두 수선공을 지나 한참을 걸었다. 숨이 차올랐다. 나는 호텔이 있는 비탈면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오르막길을 올랐다. 가파른 오르막길 끝으로 멀리 숲이 보였다. 숲 앞쪽에 사람들 몇이 서 있었는데 나무들인지도 몰랐다. 나는 갑자기 시력이 나빠졌다고 느꼈다. 나무들이 숲으로도 사람으로도 보였다. 길 양편으로 노란색 트램이 지나갔다. 나는 오늘 아침, 로드하라에 트램이 있었는지 생각했다. 호텔이 있는 비탈면에 트램이 지나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쯤 걷고 있는 걸까. 얼마나 걸은 걸까. 몹시 목이 말랐다. 이미 수많은 골목을 헤매고 다녔는데. 같은 골목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계속 전혀 다른 도시의 거리를 걷는 기분이었다. 오르막길은 끝났지만 숲은 더 멀어져 있었다. 참을 수 없는 허기와 갈증이 얇은 베일처럼 눈앞을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호텔은 어디쯤 있는 걸까. 나는 아무에게라도 묻고 싶었지만. 호텔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호텔의 이름을 떠올리고 싶었는데.
갑자기. 왜, 없이는. 왜 없이. 어떤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을까. 왜 없이. 왜를 앓지 않고.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을까. 나는 궁금해졌다. 나는 그새 또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수의 이야기를. 학수가 언젠가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는 것을. 문학수. 나는 학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묻고 싶었다. 너는 한 번은. 적어도 한 번은 왜? 라고 생각했잖아. 아니야? 그렇지만. 그게 무엇이었든. 너는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줬었는데. 나는 그때 글자도 모르는 네가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랐었는데. 멍청해. 이렇게 멍청하게도. 또 잊고 있었어. 아무것도 깊이 생각할 수가 없어 이 미친.
나는 숨을 헉헉 몰아쉬며 무엇을 향해 하는 말인지 모를 이 미친, 이 미친, 이 미친, 을 내뱉었다. 그리고 마침내.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던 낮고 붉은 지붕들이 계단식으로 펼쳐진 골목으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들어선 길은 벽화가 그려진 좁은 골목이었다.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그려진 벽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그림이 여러 겹으로 겹쳐 그려져 있어 골목을 가득 채운 벽화가 무엇의 형상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축제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했고,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장례 의식의 한 장면처럼 해석되기도 했다. 나는 한참 동안 벽화를 바라보았다. 벽화가 그려진 골목을 통과하면서 호텔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호텔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차가 세워져 있는 섬의 입구는 어딜까. 점점 호텔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나는 어딜 향해 걷고 있는 걸까.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 걸까. 생각하고 싶었지만. 몹시 피곤했고 생각은 점점 희미해졌다.
나는 목적 없이 섬의 이곳, 저곳을 계속 헤매고 다녔다. 하나의 골목을 돌아서면 길모퉁이에서 전혀 다른 도시의 골목으로 이어지는 골목, 골목들. 나는 하나의 골목이 끝날 때마다 한 도시를 통과해온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골목과 낮고 붉은 지붕들. 이끼 낀 석탑들과 금빛 계단들을 지났다. 올리브 나무가 자라는 작은 마을 로드하라에 이렇게 많은 골목들이 존재할 수 있다니. 골목은 끝없이 증식하는 것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금빛 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다다를 수 없는 어떤 곳에 닿을 것만 같았지만. 금빛 계단은 어느새 또다시 새로운 골목으로 이어졌다. 혼자이고 싶은 시간과 어딘가에라도 닿고 싶은 시간들이 동시에 지나갔다. 나는 혼자였으나 혼자이고 싶었다. 나는 누군가 그리웠고 누가 그리운지 알 수 없었다. 어떤 터널 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터널의 끝에 다다랐다고 느낄 때면 터널의 끝은 또 다른 터널의 한복판이었다. 나는 거대한 터널 속에 있는 터널 속에 있는 터널 속에 있는 터널. 무한한 골목들로 이루어진 어떤 도시에 버려진 것 같았지만. 나에게 돌아가야 할 곳이 있을까. 맨 처음 내가 떠나온 곳은 어디였을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때. 나는 또 다른 어떤 골목을 걷기 시작했고 꼬리잡기를 하느라 우르르, 우르르 몰려다니는 아이들을 보았다. 꼬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앞 아이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은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왠지 꼬리잡기 놀이에 끼어 아이들의 겨드랑이에 간지럼을 태우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날 밤. 골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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