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해서 소설 <11화>
붉은사슴, 토끼, 멧돼지, 주머니쥐, 옛도마뱀을 보았다.
작은 미끄럼틀을 보았다.
sin, cos, tan를 보았다.
당기세요와 미세요를 보았다.
C단조와 D장조를.
땀에 젖은 남자들을 보았다.
24년 전에 한쪽 눈이 실명된 분을 찾습니다. 병원에서 병에 눈이 찔린 현재 50대 후반 남성입니다. -도움을 주신 분께 사례하겠습니다. 벽에 붙은 현수막을 보았다.
환한 고요, 슬픈 침묵, 늘기만 한 프로작
여름, 열매들을 보았다.
새빨간 자두 빨갛다가 빨갛다 까맣다
혀를 깨물기도 했다.
무심코
너를 잊은 듯이
침팬지도 쌍둥이를 낳아
사랑에 대해 말하려는데 이별의 기억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삶에 대해 말하려면 죽음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빛나는 폐허가 있어
대개, 한 번은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병력의 목록은 유행가처럼
상처를,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세계의 찢어진 구멍들을, 당신을, 나를, 말해보려고 애쓰는
아무도 없는 작은 놀이터
집에서 누군가와 싸우고 뛰쳐나와 앉은 그네
그네 위에서 앞뒤로 흔드는 두 발
새롭게 태어나는 아기들, 간지럼, 널 어쩌면 좋니
억울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는 듯
한차례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 같은
비에 젖은 땅과 나뭇잎, 눈물짓는 여자들을 기억해
시간이 지나도 어쩔 수 없는 것들과 어쩔 수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갑작스럽게 터지는 울음과 밤의 희미한 뒤척임
부어오른 시간을 문지르는 엄마의 손길
문밖에 밤, 이미의 세계
무의미의 무게를 견디느라
그 무게를 떠받치느라 그렇게나 많은 물건들이 필요하단다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발병처럼
느낌은 생겨나
또 그렇고 그런 밤이 되겠지만
힘들다, 너무 힘들다는 누군가의 신산한 고백을 듣게 된 날
너도 그렇구나
아무것도 돌려줄 말이 없어
깜빡, 깜빡, 사라졌다 나타나는 순간, 순간, 들
위중한 허기의 기록
물오른 봄 처녀 보지
로드하라는 빼곡한 소원들, 낙서들의 도시지
돌아가고 싶다면 로드하라가 위치한 만의 이름을 기억해
나는 벽에 적힌 낙서들을 보았다. 낙서들의 골목을 통과하는 동안, 마당에 나와 머리 빗는 여자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는데. 결국 바람결, 숨결, 물결. 글쎄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극과 극. 안녕과 안녕의 간극. 흰 벽에서 흰 벽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검은 문장들만 남은 것 같았다.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순식간에 내가 살았던 모든 시간을 동시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것들은 단번에 수많은 이미지들로 되돌아왔다. 내 피부는 희고 부드러웠다. 내 피부는 뜨거운 빛에 검게 그을렸고, 빈틈없이 쭈글쭈글했다. 나는 그저 어떤 한 골목을 통과하고 있었는데.
반짝이는 혼, 고요한 혼. 빛나는 혼.
몇 시간쯤 지났을까. 주변에 박하 향이 감돌았다. 도시가 도시로부터 떠오를 것 같았다. 깊은 어둠으로부터. 도시 전체가 그대로 떠올라 사라질 것 같은 그 순간, 빛나는 은빛 연두. 빛 아래 빛으로 부서지는 빛.
펑. 펑. 펑. 멀리서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