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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03 20:08 수정 : 2014.10.04 14:18

[토요판]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
(1) 연재를 시작하며

▶이서희 결혼 전이나 후나 다른 남자(그리고 여자)가 많이 궁금한 여자. <관능적인 삶>이란 책의 저자. 법학도의 탈을 쓰고 영화와 인문학 주변을 맴돌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와 마음껏 놀았다. 결혼 후 미국에서 12년째 살고 있고, 장차 나와 당신을 함께 발견하고 이해하는 어른들의 학습놀이 공간 ‘유혹의 학교’를 열고픈 꿈을 갖고 있다. 지면으로 먼저 시작하는 ‘유혹의 학교’는 격주 연재다.

1년 만이었다.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은. 그를 알게 된 지는 20년이 넘었고 우리는 한 번도 연인이 된 적 없이 그 시간을 지냈다. 매력적인 남자와 친구로 지내는 것은 만족스러운 일이다. 나아가 위안이 된다.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된 것은 세상의 모든 매혹적인 남자와 연인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 때로는 긴 세월을 적절한 거리감과 함께 나누는 편이 더 괜찮은 경우도 있다. 종종 연인관계는 너무 많은 것을 앗아가니까. 죄다 얻었다가 모조리 잃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은 대상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다. 그건 그와 내가 서로에게 느끼는 긴장감이 결정적이지 않았다는 뜻도 되겠고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20년 동안 우리는 적당히 어긋났고 그 어긋난 거리감에 익숙해졌다. 스쳐간 연인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지만, 서로에 대한 감정은 들춰내지 않는다. 그와 나는 딱 이만큼의 남자 여자로서 만족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천천히 배워 간다. 그의 시선은 부드럽고 다정하다. 마주 보고 있으면 두 눈은 나 하나만으로 가득 차 보인다. 여자와 함께 있는 시간을 제대로 누릴 줄 아는 남자다. 즉, 여자를 누리게 해주는 남자라는 의미다. 여자는 생각보다 도덕적이거나 규범적이지 않다. 다만 매혹적이지 않은 남자, 유혹할 줄 모르는 남자를 도덕으로 외면할 뿐이다.

여자를 말하게 하는 남자

“나이가 드는 게 내게는 그리 불리한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어.”

눈앞에 놓인 레드와인을 한 모금 삼킨 뒤 내가 말했다.

“그래? 다행인걸. 지금도 나에게는 네가 20대 때 그 모습으로 보이기는 해.”

다정한 시선에 궁금한 표정까지 입었다. 내가 하려던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서 더 듣고 싶다는 듯이. 여자를 말하게 하는 남자, 혹은 말하고 싶은 여자를 들어줄 줄 아는 남자이다.

“알다시피 나는 항상 내 또래 남자만 좋아해 왔잖아. 그렇다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아지는 남자도 함께 나이가 들 거 아니야? 같이 늙어가니 상대적 상실감에 불안해할 필요도 없고. 얼마 전에 들었는데, 여든살 할머니가 여든둘, 일흔여덟 할아버지랑 삼각관계라고 하더라. 다들 청춘일 때 만났다가 재회한 건데, 서로를 보는 눈빛은 20대 때 그대로래. 그래서 아직 상태 좋을 때 내 또래 멋진 남자들과 많이 만나보려고. 나이가 들어서도 서로의 예전 모습을 기억해줄 남자들이 있다는 건 좋은 일 아니야? 그리고 비록 20대는 아니지만, 지금의 내가 결국은 앞으로 가장 젊은 내가 될 거고.”

“좋은 생각이야. 나이가 들 때까지 자신이 매력적인 존재란 걸 확인하며 살 필요는 있을 것 같아.”

“응. 보톡스 한 대 맞느니 남자들의 시선 한번 받아주는 편이 더 생기를 돌게 한다고 믿어. 아직까지는.”

그가 웃는다. 그의 미소는 특별하다. 상대의 말에 터져 나오는 웃음이 아니라 그런 말을 하는 대상이 사랑스러워 짓는 웃음처럼 느껴진다.

“얼마 전에 캐머런 디아즈가 난독증이 있는 파티걸을 연기하는 <당신이 그녀라면>(In Her Shoes)이라는 영화를 봤어. 거기에 보면 주인공이 우연히 실버타운 내 요양원에서 일하다가 시력을 잃은 영문학 노교수를 만나는 에피소드가 있어.”

그의 설명에 따르면, 노교수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보기 시작한 여주인공에게 책을 읽어 달라는 핑계로 가까워지는 데 성공한다. 비록 눈은 보이지 않더라도, 노인은 그녀가 아름답고 섹시한 여자임을 느낄 수 있었을 거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노교수는 그녀에게 시를 읽게 하고 난독증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을 넘어서 자기긍정의 힘까지 심어주는 데에 이른다. 그가 덧붙였다.

“나는 말이야. 죽을 때까지 곁에 있는 여성을 유혹하는 남자가 되고 싶어. 바로 그 노교수처럼.”

“둘 사이에 어떤 이성적 감정 교류가 있었어?”

“뭐, 딱히 있었다거나 없었다고 규정하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둘 사이에 오갔던 감정적 교류는 유혹의 일종이었다고 생각해. 상대방이 자기 스스로를 특별히 느끼게 하고 또 그를 통해 나 자신을 특별하게 만드는 행위로서. 그리고 노교수는 그녀에게 자신의 아들과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거든. 일종의 가장된 혹은 전이된 프러포즈이지.”

문득, 프랑스 유학을 시작하던 무렵의 경험이 떠올랐다. 백발이 성성했던 한 노신사의 천연덕스러운 접근에 당황했던. 그는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것을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치부했다. 그 문제를 두고 가까운 프랑스 친구에게 상담을 구했는데, 그의 대답은 기존의 내 생각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이곳은 모든 관계가 유혹에 기초되었음을 인정하는 사회야. 서로를 유혹하고 싶어 하고 유혹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 해. 당장의 결과를 위해서만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라고나 할까.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관계를 형성해.”

그에 따르면 유혹의 행위는 반드시 연인이 되고 싶어서 저지르는 일도 아니고 오직 이성 간에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도, 직장 상사와 새 계약을 맺을 때도,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도 우리는 서로를 유혹한다. 정치인은 대중을 유혹하고 저자는 독자를 상대로, 가수는 청중을 유혹한다. 상대가 있는 한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일인 것임은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유혹하기도 하고 우리의 삶을 유혹하거나 그에 유혹당하기도 한다.

선전포고라도 당하듯 나의 프랑스 생활을 열어 재꼈던 말, 유혹. 20년이 넘는 한국 생활 동안 숱하게 전해들은, 그 강력한 위험을 경고하는 이야기들은 유혹을 파멸과 짝패로 만들었다. 힘의 불균형, 홀림과 무력한 이끌림, 개체의 파괴로 이어지는 서사는 유혹의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강조하고 마법에 가까운 위력에 환상을 품게 했다. 선원들을 시퍼런 바닷물로 뛰어들게 하는 세이렌의 노랫소리나 필름 누아르 속의 팜파탈의 매혹은 불길한 여성성의 전유물로 느껴지기도 했다. 유혹은 추락을 예감하는, 순간적 유포리아(euphoria)를 향한 질주였다. 이렇게 길들여진 유혹의 개념은 위험하고 불온한 기운을 내포하는 것이었고, 다가가고 싶지만 이르기도 전에 도망가야 할 무엇처럼 여겨졌다. 그런 면에서 나를 노골적 유혹의 한가운데에 던져놓은 프랑스 생활은 전장과 다름없었다.

여자는 생각만큼 도덕적일까
다만 매혹적이지 않은 남자
유혹할 줄 모르는 남자를
도덕으로 외면할 뿐이다

백발이 성성했던 한 노신사의
천연덕스런 접근에 당황한 나
프랑스 친구가 귀띔해주길
“이곳서 유혹은 존재의 방식”

그들의 거침없는 접근에 혼란

문화적 차이라고는 해도, 그들의 거침없는 접근은 빗발치는 총탄처럼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적절히 반응하는 법을 몰라 어리둥절하기 일쑤였고 그런 내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 같아 불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차츰 총탄의 리듬을 발견하고 그에 맞춰 걷거나 뛰거나 춤을 출 줄 아는 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내 안에는 나도 알지 못하던 유혹자가 혹은 유혹받고 싶어 하는 자가 살고 있었다. 유혹은 특별한 남성과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시선으로 바라본 사람들의 행동에는, 관계의 기초를 유혹이라고 인정하는 믿음, 나아가 자신의 매력을 확신하는 자기긍정의 힘이 든든한 배경으로 있었다. 마땅히 유혹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자세, 유혹하는 자나 유혹받는 자 모두를 유혹이라는 회로에 공평하게 담아내는 태도를 보았다. 유혹은 때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힘이기도 했고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리고 6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끝낸 이후 12년을 미국에서 주부로서 지내며 엄마와 아이 사이를 오가는 유혹을 체험하고 새로운 문화 곳곳에 자리 잡은 유혹의 다양한 형태를 보았다. 어디를 가든, 각각의 문화에 따라 유혹의 코드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세상은 어쩌면 끊임없는 유혹의 현장이자 학습터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이서희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근처 팥빙수 집에서 빙수를 나눠 먹고 헤어졌다. 언제나 그와 헤어지는 길은 조금 아쉽고 서운하다. 소진하지 않은 유혹과 그 미련이 남아 우리는 언젠가 또 만날 것이다. 이와 같은 거리감은 동지애가 되기도 하여, 나는 그가 나아갈 유혹의 여정에 건투를 빌 수 있다. 오디세우스처럼 20년을 채우지는 못했으나 18년 만에 고향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바다를 벗어난 세이렌의 이야기가 더 궁금한 나에게도 유혹의 축복이 그득하기를. 항해를 마치고 육지로 돌아온 첫 디딤으로서 여기 ‘유혹의 학교’를 연다. 유혹은 상대의 매력은 물론 자신을 발견하고 탐험하는 수업이다. 추락과 파멸을 수업료로 치르지 않아도 되는. 칼럼의 공간은, 유혹의 필요성을 잊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겪고 듣고 상상한 유혹의 짧은 이야기들을 나누는 곳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멋진 남자를 만나 인터뷰하고 그 소회를 첫 데이트 회고하듯 풀어놓는 일도 가능하면 해보고 싶다. 남자감식가라도 된 듯, 그래서 “이주의 권장남”을 추천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이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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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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