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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
(6) 운명의 휴가
▶이서희 결혼 전이나 후나 다른 남자(그리고 여자)가 많이 궁금한 여자. <관능적인 삶>이란 책의 저자. 법학도의 탈을 쓰고 영화와 인문학 주변을 맴돌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와 마음껏 놀았다. 결혼 후 미국에서 12년째 살고 있고, 장차 나와 당신을 함께 발견하고 이해하는 어른들의 학습놀이 공간 ‘유혹의 학교’를 열고픈 꿈을 갖고 있다. 지면으로 먼저 시작하는 ‘유혹의 학교’는 격주 연재다.
“요즘 나는, 운명의 휴가에 대해 생각해.”
작년 여름 K가 이와 같은 말을 꺼냈을 때, 나는 그녀 뒤편으로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잠시 정신이 팔려 있었다. 창문은 넓었고 반쯤 열려 있었다. 창가 테이블이 금세 젖어버릴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던 참이었다.
그녀는 기존의 삶과의 맥을 끊고 정해진 기간을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일상에의 복귀를 염두에 둔 일탈이 아닌, 휴가 이후 책임질 몫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그것을 반드시 “운명의 휴가”라고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운명과의 비밀 계약 같은 것, 그래서 운명을 제외한 누구도 운명을 벗어난 자신의 행보를 알 수 없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필요하다면 자신도 모든 것을 잊고 돌아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술잔을 남김없이 비운 뒤 대답했다.
“운명의 휴가라는 말은 너무 비장하게 들리는걸. 어쩐지 죽음의 냄새가 나. 애초에 인간에게 운수와 명수가 정해져 있다고 하는 게 운명인데, 거기에 휴가를 얻을 수 있다는 건 그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잖아. 한 운명을 끝내고 다른 운명으로 들어서지 않는 이상 운명에는 휴가가 개입할 여지가 없어.”
순탄하게만 살아왔던 여자 K가‘운명의 휴가’에 대해 말을 꺼냈다
남편이 아닌 사람과 죽도록
섹스만 하다 돌아오고 싶다니 그녀는 죄책감 넘어 자신에 대한
혐오까지 겪고 있음을 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은밀히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법 앞으로 살날은 까마득하고 K의 삶은 지금까지 한 치의 비틀거림 없이 순탄하게 이어졌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모범적인 학창 시절을 보냈고 대학 졸업과 함께 직장에 들어갔다. 대학 때 만난 남자와 긴 연애 끝에 결혼했고 두 사람 모두 성실한 일상을 이어갔다. 아이를 낳았고 차분히 승진했고 작은 집도 마련했다. 아이는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정해진 학제를 따라 초중고 교육과정을 마치듯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운명이란 지난날 닥치고 따라온 학과과정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학교에는 방학이라도 있지. 이놈의 인생의 운명이란 건 휴가도 없고 말이야.” 얼마 전까지 반짝이던 K의 눈빛은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 보니 그녀의 휴가 내용조차 묻지 않았다. 도대체 휴가를 어디에 쓰고 싶은 거지? “남편이 아닌 사람과 죽도록 섹스만 하다가 돌아올 수 있으면 좋겠어.” 나는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운명의 휴가를 고작, 남편이 아닌 남자와의 섹스에 쓰겠다니. 내가 아는 한 K의 남편은 그녀의 두번째 남자였다.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은 어느덧 20년이 되어갔다. 서로가 상대의 부재를 상상할 수 없는 단계라고 그녀는 남편과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고는 했다. 나는 언젠가, 그녀가 흘리듯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이 마침내 잠자리를 하게 되었을 때, 도무지 멈출 수가 없어 꼬박 사흘을 여관방에 갇혀 지냈노라고. 자신의 삶을 통틀어서 그때만큼 온전한 느낌이 들었던 적이 없었노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었다. 무엇을 말하는지 안다고. 수그러들 것 같지 않은 들뜸에 몸을 맡기고 그것을 소진하고 또 소진한 뒤에 찾아오는 평온함을 안다고. 인생에서 그와 같이 순하고 나른한 평온감이 얼마나 드물게 찾아오는지조차 알고 있다고. “그렇게 내 마음을 들뜨게 했던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이제는 다른 단계에 접어들었고 그래서 뿌듯하고 행복하기도 해. 긴 시간을 헤쳐 온 서로가 고맙고 대견하지. 잠자리도 나쁘지 않아. 가장 적합한 상태로 온도 설정이 되어 있는 방 같다고나 할까. 아무리 매혹적인 상대가 나타나도 타인은 그 온도를 맞출 수 없기 때문에 나를 유혹하는 데에는 실패하겠지. 이 안락함을 벗어날 의사는 없거든. 그런데 가끔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시한부 인생처럼 허탈해지는 거야. 이제 더 이상 온몸이 닳아 없어질 것 같은 열정의 순간은 찾아오지 않는 걸까 싶어서. 남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비슷한 심정을 짐작할 수 있어. 이 사람, 나를 많이 사랑하는구나. 하지만 가끔은 초조하구나. 마지막 사랑이라는 심정으로 나를 마주하며 살기에는 앞으로 살날이 까마득하다고 느끼는구나.” 인생의 한때를 휩쓸고 간 정념의 대상이 자신 앞에 있는데도, 그 안의 어떤 연속성은 세월 앞에 동강 난 다리처럼 덜렁거린다. 그래서 가끔은 휴가를 꿈꾼다. 잠깐 떠났다가 돌아올 수 있다면, 일상을 뒤흔들지 않고도, 어느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고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털어놓는 친구에게 가장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너희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 네 남편이 네가 아닌 다른 여자와의 열정적 섹스를 꿈꾼다면 어떻겠어? 대부분의 여자들, 아니 적어도 내가 아는 K는 이와 같은 고민을 수천 번은 하고 또 했을 것이다. 이미 죄책감을 넘어서 자신에 대한 혐오까지 겪는 중일 게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은밀히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실행에 옮길 수 없으니 주절거리고라도 싶은. 고백성사처럼 털어놓고 떨쳐버리고 싶은. K는 지난여름 어느 이국의 도시로 출장을 다녀왔다. 유독 습기가 높은 그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덮쳐오는 축축한 열기에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바쁜 일정의 사흘을 보내고 마지막 저녁 그녀는 여행가방 구석에 챙겨둔 서머드레스를 입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낯선 얼굴, 적막한 시선, 소란한 거리를 헤쳐 나가서는 누구도 마주칠 것 같지 않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멋들어진 술집 하나쯤은 찾아가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주문을 받는 이도, 주문을 하는 그녀도 어색한 영어를 구사해야만 했지만, 그 모든 설정이 한편의 단편영화처럼 완벽하다고 느꼈다. 바닷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 자리잡고 간단한 음식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온몸에 베일처럼 감기는 땀을 간간이 식히는 밤바람이 불어왔다. 가만히 눈을 감고 집중이라도 하면, 쉴 새 없이 파괴되고 재생되는 수십만의 신체 세포들이 알갱이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시차 때문인지 맥주 한 잔만으로도 취기가 올랐다. 화장실로 걸어 들어가는 동안 발걸음을 헛디딜까 몸에서 긴장을 한시도 풀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조금은 다르게 생긴 이국의 여자, 혼자인 여자가 나른한 밤의 식당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화장실 거울 저편의 여자는 낯설었다. 밝고 건강하고 씩씩한 서른아홉 주부이자 열두 살 아들의 엄마 대신 여전히 매끈한 어깨선을 드러내고 있는 한 여자가 거울 속에 서 있었다. “내 눈빛인데도 낯설더라. 맞아, 그랬지. 나는 저렇게 장난기 어리고 유쾌한 눈빛으로 내 남편을 유혹했었지. 참 아슬아슬한 권력이었어. 도무지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결과를 예측하기가 힘들었던. 누군가는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내가 먼저 자신을 도발했다며 폭력적으로 다가서기도 했어. 내가 당황하며 호감이 없다는 의사를 밝히자 오히려 화를 내었어. 내가 먼저 유혹하지 않았느냐고.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누군가는 나를 유혹이라는 죄명으로 몰아세우는 걸 보며 배웠던 것 같아. 함부로 욕망하지 않아야 하고 무작위로 매력적이어서도 안 되는 거라고. 남편을 만나 모든 관계를 정리하고 안정된 연애의 길을 걸었던 것은 나를 참 평안하게 했어. 단 한 사람의 여자인 양 살아가면 그런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거든. 실제로도 그랬고. 한동안은.” 냅킨에 볼펜으로 눌러쓴 티켓 한 장 창밖으로 내리는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둘 다 술기운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말을 바꿔 K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그냥 특별한 티켓을 선물 받는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승차권 같은. 왕복권이지. 표를 내고 버스에 올랐다가 한 바퀴 돌고 집 앞으로 멀쩡히 돌아올 수 있는 정도로 해 두자.” 그리고 앞에 있는 냅킨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썼다. ‘티켓: 기한 - 마음대로. 장소 - 닿는 대로. 제한 - 운명이 변하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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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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