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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1.16 20:06 수정 : 2015.01.18 10:34

[토요판]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
(8) 유혹의 아이들

▶이서희 결혼 전이나 후나 다른 남자(그리고 여자)가 많이 궁금한 여자. <관능적인 삶>이란 책의 저자. 법학도의 탈을 쓰고 영화와 인문학 주변을 맴돌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와 마음껏 놀았다. 결혼 후 미국에서 12년째 살고 있고, 장차 나와 당신을 함께 발견하고 이해하는 어른들의 학습놀이 공간 ‘유혹의 학교’를 열고픈 꿈을 갖고 있다. 지면으로 먼저 시작하는 ‘유혹의 학교’는 격주 연재다.

아이를 잃어버렸음을 깨달은 것은 골목이 끝난 지점에 다다라서였다. 눈앞에 바다가 펼쳐졌지만, 아이들은 앞서 달려나가지 않았다. 불길한 느낌에 돌아보니 두 아이 모두 사라진 뒤였다. 아침부터 칭얼대는 만 아홉, 열한 살짜리 두 딸아이를 깨워 기차를 타고 바르셀로나 교외의 바닷가 도시에 나왔다. 기차에서 내내 잠을 자다 일어난 아이들은 내리자마자 쉬지 않고 싸워댔다. 서로의 인내심을 시험하듯 짜증을 부려대는 아이들을 골목 구석에다 세워놓고 야단을 쳤다. 감정적으로 격앙만 될 뿐 효과는 없었다. 나는 말을 멈추고 뒤돌아 걸어나갔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이국의 도시에서 엄마를 따라오지 않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짧고 좁은 골목길이었지만, 아이들이 사라진 그곳은 평온한 얼굴의 사람들로 북적댔다. 양옆으로 늘어진 상점 안을 들여다보며 경사진 골목길을 뛰어올랐다. 옆 골목들을 뒤지기도 했다. 기차 타고 돌아가겠다던 아이의 말이 생각나, 역까지 정신없이 달려갔다. 아이들의 흔적은 없었다. 마침 눈앞에 보이는 관광사무소에 찾아가서 경찰서에 연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잠시 후 찾아온 경찰에게 간단히 상황 설명을 하고 함께 경찰차에 올랐다. 그때 문득, 아이들에게는 엄마 잃은 공포보다 모래사장의 매혹이 더 강력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닷가에서 노는 걸 무척이나 좋아하는 애들이에요. 혹시 모르니 애들과 헤어진 곳에서 멀지 않은 바닷가로 가보는 게 좋겠어요.”

아이들 허겁지겁 몰고 다닌 여행
그들의 흥미를 돌리는 일이란
내가 태어나서 시도했던 유혹 중
가장 험난한 여정이었다

나의 즐거움과 너의 즐거움이
만나는 자리를 고민하고
두 즐거움의 거리 가깝게 하는
경이로움은 유혹의 가장 큰 보상

여행지에서 갑자기 사라진 아이들

해변 도로에 이르렀을 때에는 아이를 잃은 지 두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애들의 흔적을 찾아 천천히 달렸다. 잠시 후 바닷가 옆 보도에 서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차를 세우고 뛰어갔다. 내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달려와서 안기는 아이들의 말짱한 얼굴에 마음이 놓였다. 머릿속을 불안하게 떠돌아다니던, 울면서 엄마를 찾는 아이들의 이미지는 그대로 삭제. 대신 내가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하다며 내 등을 쓰다듬는 아이들. 나 역시 그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눈물을 훔치고 경찰에게 거듭 감사 표시를 하고 아이들에게도 인사를 시켰다. 벗어둔 외투를 다시 입는 둘째의 얼굴에는 모래가 잔뜩 묻어 있었다.

“바닷가에 집 지었어요. 거실이랑 침실도 있고 화장실까지 만들었거든요. 빨리 와 봐요.”

아이들이 흥분된 목소리로 외치며 내 손을 이끌었다. 엄마가 알아볼 수 있도록 길가 나무에 외투를 걸어놓고 모래사장에서 성을 짓고 있었단다. 찾아 나설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엄마의 자취를 잃은 것을 깨닫고 골목골목 뒤지다가 바닷가로 왔다고 했다. 하긴, 바다를 보려고 여기까지 왔으니 바닷가에서 기다리는 것도 당연했다. 돌아보니 우리가 헤어진 골목이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모래사장에서 노는 와중에도 틈틈이 도로에 나와 엄마의 흔적을 살폈다고 했다. 반드시 찾으러 올 것 같아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며, 오히려 모험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조금 설레기조차 했단다. 혹시라도 엄마를 못 찾으면 둘이 살 곳이 필요해서 집을 지은 거라 말하며 킬킬대기까지 했다. 그들 손에 이끌려 찾아간 집은 거실보다 화장실이 더 넓었다. 깊게 파놓은 구멍에 불과했지만. 그동안의 긴장이 풀리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들도 따라 웃었다. 그러고 보니 여행 내내 큰 소리로 웃어본 적이 없었다. 벼르고 별렀던 내 인생 최초의 스페인 여행답게 가고 싶은 곳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맞추려고 억지로 간소화한 일정임에도 소화하기 힘들었다. 참다못해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지 않으려고 버티는 아이들을 깨우며 말했다. 비행기 표에 숙소 비용까지 지불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면 속상할 거라고. 아이들은 기차역을 향해 가는 길에서도 지그재그로 뛰어갔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첫째가 땅바닥에서 플라스틱 조각을 집어 들어 동생에게 보여줬다. 나는 아까 한 말을 잊었느냐며 아이를 재촉했다. 첫째가 대답했다. 엄마, 나는 지금 즐기고 있는데요. 투명하게 반짝이는 푸른 조각을 햇빛에 비춰 보이며 말했다. 아이의 지적에 움찔했다. 네 말이 맞기는 한데, 오늘은 계획이 있단 말이야. 나는 직선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다니면,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 무의미해질 때가 많다. 관광지 한 곳을 찾아가려 해도 아이들의 호기심에 도착하기도 전에 멈춰 서야 할 곳이 많다. 여행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을 윽박지르고 무작정 먼저 걸어가 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아이의 보폭에 맞추지 않고 허겁지겁 따라오게 만들었다. 내가 들인 비용만큼 누려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비용에 따른 대가란 별 의미가 없었다. 아이의 흥미를 돌리는 일이란 과연, 내가 태어나서 시도했던 모든 유혹 중 가장 험난한 여정이었다. 내게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오늘은 시체스 바닷가, 내일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아이들을 배려해서 일과도 느슨하게 잡았고 장소 결정도 아이들의 의견을 반영했다. 리스트는 내가 마련했지만, 그들이 바닷가를 선택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즐기는 거라며 플라스틱 조각을 손에 들고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과연 나는 즐기는 중인가. 우리는 함께 즐거운가.

조삼모사는 상대를 기쁘게 하는 과정

피곤하다는 핑계로 배려는 차츰 줄어들었다. 무작정 엄마 말을 들어주는 아이들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나와 다른 상대의 즐거움을 고려하지 않으니 내 즐거움도 사라졌다. 철학자 강신주는 <망각과 자유>라는 책에서 조삼모사(朝三暮四)의 뜻을 상대의 즐거움을 찾기 위한 거듭된 시도로 설명했다. 주인은 자신의 제안에 화를 내는 원숭이를 통해 타자성을 경험한다. 자신과 같지 않음,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당혹감은 판단 중지 상태를 경험하게 한다.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주인은 새로운 제안을 하고 이번에는 원숭이들의 기쁨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저자가 해석하는 조삼모사는 상대를 속이고 조롱하는 과정이 아니라,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 기꺼이 나서는 여정에 가깝다. 유혹의 과정도 다르지 않다. 유혹에 전제가 되어야 할 것 역시, 타자성의 발견이다. 상대가 나와 다름을 깨닫는 것. 그리고 적극적으로 상대의 욕망을 탐험하고 고민하여 그가 내게 자발적으로 다가오도록 하는 행위가 바로 유혹이다. 나의 즐거움과 너의 즐거움이 만나는 자리를 고민하고, 어느 순간 우리의 즐거움이 부쩍 가까워진 것을 발견하는 경이로움은 유혹의 가장 큰 보상이다. 물론, 타자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일은 두렵고도 지난한 과정이 되기도 한다. 거부당할까 두려워 도망가기도 하고 공격적 태도로 미리 무장하기도 한다. 유혹은 이와 같은 두려움을 해소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위험한 상대가 아니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상대임을 설득하며 다가가고 또 상대를 자발적으로 다가오게 하는 일이다. 그 설득은 상대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혹하다’라는 의미의 seduce라는 단어는 라틴어 seducere에 연원을 두고 있다. se는 away, 즉 떨어져 있음을 의미하고 ducere는 lead, 즉 이끈다는 의미다. 연결해보면, 떨어져서 이끄는 것을 말한다. 함부로 침범하고 윽박질러 끌어오는 것이 아닌, 거리를 두고 다가오게 하는 일. 나는 여기서 등장하는 거리를 두려움을 넘어선, 상대에 대한 존중이자 자율성의 공간이라고 받아들인다. 6년 전, 첫아이만을 데리고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때도 바닷가를 찾았는데, 아이는 말도 통하지 않는 금발 머리 아이에게 다가가 그녀가 조개를 줍는 일을 묵묵히 도와주었다. 처음에는 조금 멀리서 그녀 주변을 맴돌다가 차츰 다가갔다. 아마도 어떤 종류의 조개를 좋아하는지 찬찬히 살펴보는 듯했다. 잠시 후, 아이는 그녀가 좋아할 만한 조개를 주어 곁에 놓아주었다. 그렇게 천천히 시작된 놀이가 한 시간도 넘게 이어졌다. 두 아이는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즐겁고 평온해 보였다.

돌아오는 길, 수평선 너머로 해가 저물고 하늘이 색색으로 물드는 장엄한 풍경을 아이들과 바라봤다. 묻지도 않았는데 아이가 먼저 말했다.

“엄마,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내일은 엄마가 저번부터 가고 싶다던 곳에 가요. 그 이상하게 생긴 성당 말이에요.”

이서희
애써 배우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유혹의 자질을 태곳적 기억처럼 품고 있는지 모른다. 햇빛의 유혹에 몸을 맡긴 잎사귀는 초록으로 빛나고 애인을 찾아 항해에 나선 고래는 제게로 오는 길을 노래로 알린다. 그리고 아이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세상의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나아가는 법을 알고 있다. 그 걸음으로 아이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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