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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
(9) 어느 연애평가보고서
▶이서희 결혼 전이나 후나 다른 남자(그리고 여자)가 많이 궁금한 여자. <관능적인 삶>이란 책의 저자. 법학도의 탈을 쓰고 영화와 인문학 주변을 맴돌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와 마음껏 놀았다. 결혼 후 미국에서 12년째 살고 있고, 장차 나와 당신을 함께 발견하고 이해하는 어른들의 학습놀이 공간 ‘유혹의 학교’를 열고픈 꿈을 갖고 있다. 지면으로 먼저 시작하는 ‘유혹의 학교’는 격주 연재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났다. 상황만 허락하면 진한 연애로 나아가고 싶었다. 세련된 매너라든가, 다방면에 걸치는 지식을 허세 없이 드러내는 자세도 매력적이었다. 그 역시 내게 마음이 있는 눈치였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 눈을 피해 나를 바래다주러 나올 리가 있겠는가. 우리끼리 집 근처 술집에서 2차를 했다. 대화는 유쾌했다.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게. 그러나 갑작스레 찾아온 정적이 조금 당황스럽다. 나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건만. 첫 데이트에 끼어드는 정적은 다음 중 하나이다. 어색함, 지루함 또는 도약에의 시도. 대화가 사라진 자리에 그의 시선이 들어왔다. 한 호흡 길게 눈빛을 마주쳐 보면 알 수 있다. 시선을 피하고 싶은 상대인지, 감내할 수 있는 상대인지, 아니면 빠질 듯이 바라보고 싶은 상대인지.
“나갈까요?” 그가 말했다.
상대와 함께 있는데 내 연애를스스로 중계하는 기분 아는가
한번 그 길로 들어서면 돌아가는
다리는 폭파된 거나 마찬가지 비교평가 좋아하던 그 사람
내가 상대방 서류철 안으로
차곡차곡 정리되는 것 실감하자
관계 몰입도는 단숨에 떨어졌다 기다리던 연애의 시작, 그러나… 어느새 인적이 드문 길로 들어섰다. 그가 슬며시 나를 벽으로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그의 입술이 내게 닿았다. ‘제대로 된 키스를 보여주겠어!’ 나의 승부욕은 매번 이럴 때나 발휘된다. 몰입이 되지 않는 만큼 나는 성심껏 키스에 응했다. 내가 나서서 욕망하는 사내도 있지만, 나쁘지 않아 시작했다가 만날수록 빠지는 남자도 있으니까. 그의 냄새부터 끌어안는 자세까지 적어도 거부감은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키스도 괜찮았다. 잠자리로 가기 위한 전초전에 불과한, 혀 삽입식 휘몰아치기는 아니었다. 입맞춤 이후도 좋았다.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손을 잡았고 설레는 연인처럼 늦은 밤의 골목길을 함께 걸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연애의 시작이다, 내심 쾌재를 불렀다. 몇 차례 연애에 실패해 본 사람은 안다. 그 허무함을 뼈저리게 겪어본 사람은 안다. 전투력은 상승하는데 시작할 의지에는 쉽게 발동이 걸리지 않는다는 걸. 반면, 뜨거운 시작에는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다.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요구될 뿐. 키스능력 증명 욕구 따위도, 상대를 꼼꼼히 관찰하며 검사하는 행위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붉은 입술에 푸른 멍이 들 때까지 입을 맞추고 몽롱한 기분에 다리가 풀려버린다. 하체가 실종되는 기분만큼 뇌는 작동을 멈춘다. 상황이 종료된 뒤에야 복기능력이 발휘된다. 그런데 가만. 내가 그런 경험을 해보기는 한 건가? 상대와 함께 있는데, 내 연애를 스스로 중계하는 기분을 아는가. 한번 그 길로 들어서면 저편으로 돌아가는 다리는 폭파된 거나 마찬가지이다. 어마어마한 열정으로 무장한 상대가 아니라면. 그런데 과연, 꽃다운 청춘의 첫사랑이 아닌 이상, 누가 연애에 막강한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욕망은 충족하되 리스크는 줄이는 사랑법을 찾기 위해 남자는 여자를 연구하고 여자는 남자를 분석한다. 연애 경험을 듣고 공유하고 나 혼자만 어리석지 않았다는 데에 위안을 얻는다. 다음번에는 실패를 넘어 성공적 연애를 하리라는 결심도 한다. 그러나 매번 찾아오는 다음번은 자꾸만 더 시들해진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애는 공공의 영역에서 논의되나 책임은 개인이 져야 할 사안이 되었다. 나는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나는 어떤 상대를 골라야 하나 등등, 조언을 얻고 결심하고 준비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렇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 지금까지 내 연애가 실패한 까닭은 내 탓, 역시나 그놈 탓, 아니면 중간에 끼어든 그년 탓이다. 밤은 부드러웠다. 우리의 산책은 몇 차례의 입맞춤으로 중단되었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알싸한 밤공기인가, 머릿속에서 보이스 오버가 절로 깔린다. 친구 ×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할 만한 데이트가 될 것 같다. 제발, 마무리까지 무사히 넘어가기를. 이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할 수 있기를. 조루성 연애로 끝나지 않기를. 그러나 상황은 예상보다 일찍 종료되었다. “너는,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여자들 중 가장 똑똑한 여자야.” 중계방송이 멈췄다. 삐이, 지지지직, 채널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시그널만 머릿속의 하얀 정적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연애를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신체검사 받듯 일렬로 늘어서서 결과를 기다리는 기분은 싫었다. 선생님의 신장계 밑에 서서 정수리를 제대로 맞은 느낌이었다. 백 육십오!!! 숫자로 객관화된 나는 아마 육십명 중 40번째쯤 되겠지. 수업 시간이면 선생님은 이름 대신 내 번호를 1년 동안 지겹게 불러댈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그 역시 우리의 만남부터 지금까지 나를 평가하고 있었을 거다. 나는 다만 그에게 알리지 않았을 따름이고 그는 당당하게 그 일부를 내게 중간보고했다. 나의 지성은 물론이고 가슴 사이즈부터 허리와 골반 라인, 다리 길이에 모양까지 이미 검사는 완료되었는지도 몰랐다.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섹스 풍습의 전환과 함께 20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자본으로 “에로스 자본”을 들었다. 섹스는 결혼의 제약에서 해방되었고 좀더 다양하고 자유로운 경험에 노출되는 것은 미덕이 되었다. 나의 매력과 섹시함은 곧 나의 재화이고 우리는 그 가치를 시장에서 매기고 확인받는다. 그러나 재화는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소외받은 자를 위한 구제제도 같은 것도 없다. 연애의 자유경쟁시장은 선택의 폭을 아득히 확장했지만, 선택의 기회비용도 그만큼 불려 놓았다. “사랑은 불안하다.” 실패의 책임은 개인의 몫이건만, 경쟁은 사회적 조건과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티브이만 틀어도 알 수 있다. 이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매력은 나이에 상당히 민감하다. 나는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나의 시한부성 재화를 최대한 활용해야만 한다(고 요구받는다). 우리의 관계가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기점을 맞은 것은 사실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연애가 끝나면 완성되는 나의 찬란한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드러내놓고 평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비교를 통해서. 나의 모든 것이 상대방의 서류철 안으로 차곡차곡 정리되는 것을 실감하자, 관계의 몰입도는 단숨에 떨어졌다. 그의 재화를 비교 분석 정리하는 내 모습 또한 뚜렷이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의 연애가, 음성 중계를 떠나 총천연색 부감 샷으로 그려지는 기분을 아는가. 이른바 유체이탈연애였다. 더불어, 허탈하게 뒤돌아설 우리 연애의 종말도 플래시 화면처럼 끼어들었다. 나는 미리 감정적 거리감을 장착한다. 이 시대의 연애는 슬프도록 이성적이라고 몸서리치며. 그리고 누가 끝냈다고 말할 것 없이 연애는 슬며시 막을 내렸다. 만남의 횟수가 줄었고 연락이 뜸해지다 종료음도 없이 정적을 맞이했다. “거짓말은 모두 젖어 있지” 기회를 놓쳤지만, 그에게 대답하고 싶었다. 당신의 기준 아래 검사도장 받을 대기자로 취급되기 싫다고. 똑똑하다는 말이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칭찬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표면만 번지르르하게 얄팍하지만 않다면, 언제든지 나를 고무하는 게 칭찬이다. 당신의 칭찬 세례에 푹 젖은 나는, 더욱더 매력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으로 그대를 유혹할 것이다. 그러나 비교칭찬만은 말아다오. 연애에서만큼은 거추장스런 자의식에서 해방되고 싶단 말이다. 왜 연애를 하는가? 세상에 단 한 사람으로 당신 앞에 우뚝 서고 싶은 바람 때문이 아닌가. 사랑의 유혹은, 상대와 나를 유일무이한 대상으로 놓지 않을 경우 이루어지기 어렵다. 노골적인 계약이나 동의를 거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유혹에서 사랑을 예견하려 하고 유혹은 거짓말을 수반한다. 유한한 삶 속에서 당신과의 영원을 꿈꾼다고 말하고, 수십억 인구 중 당신만이 내게 유일하다고 말한다. 매력의 자유경쟁시장을 감히 속이는 시도, 당신의 거짓말을 믿고 함께 속삭이는 일, 추락과 상처라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기꺼이 저 매혹의 다리를 건너는 일이다. 얼마 전 읽은 손아람의 소설 <디 마이너스>에서 다음과 같은 노랫말이 나온다. “사연 없는 사물이 늘어갈 때마다 우주는 거꾸로 가벼워진다 그러다 텅 비고 만다 견딜 수 없는 일 그래서 거짓말은 모두 젖어 있지 앙상하게 말라붙어 뼈만 남은 사실들 우리는 목이 너무 마르니까 우리는 목이 너무 마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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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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