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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
(11) 바람둥이 사용법
내 연애에서 가장 효과 좋은 수업은 바람둥이와 사귀었을 때 받았다. 그는 내 의사를 존중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물론, 나를 둘러싼 세계를 변화시켰다. 때로는 혹독한 수련 기간과도 같았다. 그의 유쾌함은 양날의 칼이었으므로. 아름답지만 잔인했다. 다만 그 상처는 쉽게 아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한계에 대해 명확했으며 내게 섣부른 기대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정교했고 능란했으며 내 안의 매혹을 이끌어낼 줄 알았다. 나는 어느 순간, 그를 유혹하는 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나와 함께 있을 때면 철저히 내 곁에서 황홀한 듯 머물렀다. 매번 처음 만난 여자인 양 설레는 눈빛으로 하염없이 바라볼 줄 알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내 영향권을 벗어날 때면, 그만큼의 집중도로 다른 여성을 바라보리라는 것을 지각하고 있었다. 그는 서투른 속임수 따위는 쓰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를 통해 순간에 집중하는 법을 배웠고 내가 다다를 수 없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여유로움을 체득했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친구가 되었다. 그를 통해 나는 친절한 바람둥이를 아끼고 활용하는 법을 배웠다. 드물지만 세상에는 이러한 종류의 인간들이 배회하고 있음을 알았다. 참바람둥이, 혹은 유혹자라는 이름의 인간들이. 자신을 거친 여자를 열거하며 존재감을 확인하려 한다거나 자신의 치명적 매력에 빠져 허덕이는 싸구려 나르시시스트와는 구분되는 존재들이. 어느 수준에 오르면 설명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나름 바람의 도덕도 깨치는 경지에 오르는 법이므로.
난봉꾼과 비교되는 참바람둥이의 도덕
바람둥이에게도 도덕은 있다. 물론 참바람둥이에게만 존재하는 도덕이다. 난봉꾼과 비교되는 참바람둥이의 도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대의 기쁨에 집중한다. 어디에 있든, 누구를 만나든, 최선을 다해 즐거움을 안겨준다. 이것은 그들의 자존감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참바람둥이에게 세상은 커다란 무대와도 같다. 자신과 유혹의 대상, 그리고 순간의 매혹을 활용하여 상대를 사로잡는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한 자들이다. 다만, 그 역할은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맞춤형 연애를 한다.
이들이 맞춤형 연애에 능하게 된 배경에는 다양한 삶의 경험은 물론이고 그 경험을 해석하고 활용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텍스트의 이해와 적용에 능숙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많이 읽고 보고 이를 파악하는 데 능하면서 인간을 이해하는 속도나 깊이가 남다르다. 자기성찰에도 게으르지 않다. 자신의 한계와 매력을 잘 알고 그것을 돋보이게 하는 법을 깨친 자들이다. 인간을 향한 예의는 기본이며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는 차라리 그들을 함께 있기에 안전한 무리로 만들기도 한다. 인간에 대한 깊고 넓은 이해는 자신을 파악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각기 다른 존재에게 다가가는 길을 넓혀주기도 한다. 상대에 따라 다양한 변신을 거듭하면서도 자기 중심을 유지할 만큼의 무게감도 갖춘다면, 제대로 선수라는 칭호를 붙일 만하다. 상황 연출 능력도 뛰어나다. 순발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빠르게 파악하고 움직일 줄 아는데, 이는 다양한 실전 경험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뼛속 깊이 받아들인 간접경험이 풍부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둘째, 그들의 거짓말은 오직 즐거움을 위해서 사용된다.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쏟아내는 수많은 찬사들 중 얼마나 많은 거짓이 섞여 있겠는가. 다만 어긋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말은 하지 않을 뿐이다. 변치 않는 사랑이라든가 정신적 결합 같은 것을 담보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미끼로 상대를 유혹하는 일은 그들의 자부심에 어울리지 않는다. 성취의 짜릿함은 자신이 가진 패를 얼마나 잘 활용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므로. 이는 그들을 진실한 자의 경지에 올려놓는 일이기도 하다. 그들의 승부사적 기질 때문에 위험하다는 판단은 당장은 내려두는 편이 좋다. 매력적인 남자와 보내는 시간은 아깝지 않다. 약간의 위험한 느낌은 자극적 즐거움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더욱이 참바람둥이라면 상대가 상처를 받지 않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상대에게 불필요한 고통이나 상처를 안기는 일은 그들에게는 유혹의 실패를 의미하니까.
매력적인 남자 또는 여자는바람둥이의 길을 걷기 쉽다
싸구려 나르시시스트와는 구분
나름 바람의 도덕도 깨친 이들 그들은 상대의 기쁨에 집중한다
즐거움 위해서만 거짓말하며
나를 특별한 자로 만들어주는
연인 안돼도 멋진 친구 될 존재 그럼에도 그들과 다른 형태의 연애를 추구하여 상처를 받는 경우를 모조리 막을 수는 없다. 결국 선택의 문제이다. 만일 유혹자의 즐거운 존재를 누릴 마음이 있다면, 아직 오지 않은 상처를 걱정하기보다 당장의 기쁨과 순간의 진실에 집중하는 편이 좋다. 그리고 대체로, 연애에 가장 큰 상처와 고통을 남기는 자는 사랑의 환상을 자극하고 관계에 오지 않을 미래를 투영하여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이다.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나 그 정신성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큰 상처제조자들이다. 물론 연애는 언제나 슬기로운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지는 않는다. 다행히도 모든 연애는 경험과 배움을 남긴다. 우리는 좀 더 경험에 여유로울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셋째, 바람둥이는 순간의 예술가이다. 누구보다 뛰어난 집중력을 가지고 있다. 함께 있는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다. 당연한 매뉴얼을 따르지 않으면서 당신보다 반 발짝 정도 앞서 상황을 파악한다. 당신을 존중하고 순간의 중심에 놓을 줄 안다. 당신의 욕구를 재빨리 파악하고 움직인다. 때로는 나서서 이끌거나 의외의 방향 틀기로 놀라움을 안겨준다. 세상을 당신의 눈으로 바라볼 줄 알면서도 거기에 조금 다른 시각을 보탤 줄도 안다. 연애란, 아니 연애가 아니라도 관계란, 새로운 세계를 여는 행위임을 아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당신을 자극하고 또 자극받을 것이다. 넷째, 바람둥이는 당신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깨닫게 해줄 것이다. 그들의 시선에 포획된 자는 누구든 특별한 자로 거듭난다. 그들에게 매혹은 캘수록 나오는 자원과도 같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 매혹적인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은 황홀한 경험이다. 무대의 조명이 온통 자신에게 떨어져 빛 속에 서 있는 기분만으로도 당신은 훗날 그 순간을 흐뭇하게 추억할 것이다. 바람둥이이자 유혹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카사노바의 예를 들어봐도 알 수 있다. 그를 거쳐 간 수많은 여성 중 그와의 경험을 불쾌하게 추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여성들의 판타지를 충족해 주었고 일생에 잊지 못할 순간을 안겨주는 것을 자신의 명예로 삼았다. 그는 수많은 여성의 일생에 선물과도 같은 존재였고 딱 그만큼의 무게와 즐거움으로 남는 법을 알았다.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관계가 관능적 다섯째, 바람둥이는 멋진 친구가 될 수 있다. 이성과 친구가 되는 일은 연인이 되는 것보다 더 까다로운 일일 수도 있다. 남녀간의 관계를 우정의 형식으로 유지하는 데는 더 많은 노력과 조심스러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바람둥이의 가장 훌륭한 사용법이 있다. 그들은 최고의 친구가 될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욕구에 반해서 억지로 관계를 강요하지 않고 상황을 여유롭게 이끌 줄 아는 그들과의 우정은 편안하고도 짜릿하다. 감정에 쉽게 놀아나거나 헷갈리는 일이 드문 만큼 만남은 안정적인 길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들은 누구보다 관계에 창조적이다. 당장의 연애에만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관계의 다양한 매혹에 기꺼이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우정은 연애만큼 다양한 형태를 지닐 수 있고 뜻밖의 순간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가장 관능적인 관계는 때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관계이다. 가능성은 미지의 함수로 남아 있되 그들과의 우정은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다. 물론 참된 바람둥이를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꽤 괜찮은 방법을 소개할 수는 있다. 바로 당신이 먼저 참된 바람둥이가 되는 일이다. 고수는 고수를 더 쉽게 알아보는 법이니. 그러므로 많이 읽고 보고 만나고 경험하라. 끊임없이 단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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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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