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요판]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
(13) 잠자는 도서관의 미남
관능의 사전적 의미. 1. 생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기관의 기능. 이에는 폐의 호흡 작용, 눈의 시력 따위가 있다. 2. 오관 및 감각 기관의 작용. 3. 육체적 쾌감, 특히 성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작용. “그녀의 관능에 유혹되다.”(출처: 네이버 사전)
내가 파리 유학 시절 만났던 그녀는 밝고 넘치는 활기로 사람을 매혹시키곤 했다. 거침없었고 그것은 때로는 도발적이기도 했으나, 위협적이기보다는 즐겁고 유쾌한 것에 가까웠다. 누구와 대화를 하든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알았고 무엇보다도 적절한 추임새와 반응으로 말하는 이가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인 양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것에서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상대방의 장점을, 쉽게 지나치기 쉬운 사소한 부분까지 발견해서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그녀 앞에 서면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존재로 변화하는 기분이었다. 눈에 띄게 아름답거나 시선을 잡아끄는 외모가 아니었음에도,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온몸의 감각이 충일해지는 경험을 했다. 함께 먹는 음식은 새롭고 맛났고, 같이 방문한 장소는 색달랐다. 그녀는 이를 두고 “관능적 체험”이라고 불렀다. 그녀에 따르면, 관능이란 삶에 필요한 신체 기관의 기능이자 그 기관의 작용이므로, 제대로 살고 느끼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관능적”이라는 말을 들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그녀는 관능적이었다.
그리고 다음은 내가 그녀에게서 들은 이야기 중 하나다. 잠자는 도서관의 미남에 관한.
어느날 도서관의 새로운 얼굴어떻게 가까워질까 궁리하다
잠자던 그를 깨워 불러냈어
그러곤 어처구니없게 만들었지 선술집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어
몸이 가까워지고 눈이 부딪치다
그의 새치를 몇가닥 뽑아주었어
밤거리를 나와 호텔로 들어갔지 너도 잘 알잖아, 결국은 자세라고 유학 생활을 마감하는 차여서 논문을 마무리하느라 학교와 도서관만 들락거릴 무렵이었어. 시간은 권태롭게 흘러갔지. 마치 내 생에 남은 섹스는 침대 안의 정상위밖에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이 나를 지배했다고나 할까.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어. 그저 새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남자가. 처음에는 생각했지.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논문 발표가 코앞이다, 정신 차리자. 그런데 생각해 보니 웃긴 거야. 대입 준비 때도 그렇고 매번 그랬잖아. 이 고지만 넘기면 대단한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 현재를 희생하는 것쯤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마치, 삶의 예비군처럼. 지금 사는 것은 내 인생이 아니라 진정한 삶을 위한 준비 단계처럼. 또다시 그런 실수를 저지르기는 싫었어.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에게 가까워질 수 있을까 궁리하기 시작했어. 우선은 내 존재를 알리는 일이 필요했지. 어느 날 운 좋게도 그 애 앞자리가 비어 있기에 망설임 없이 자리를 잡았어. 노트북 전선을 연결하기 위해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플러그를 꽂으려고 하는데, 이게 잘 맞지를 않는 거야. 바로 그때 그 애가 내려오더니 나에게 손짓으로 코드를 달라는 시늉을 해 보이더라. 그렇게 첫번째 대면을 이루었어. 넓은 도서관의 책상 밑, 둘이 몸을 엎드리고 마주한 채 전선을 주고받는 일은 생각보다 짜릿했어. 아무 일 없는 듯 위에 올라와 앉아 논문에 집중하려 했지만, 세상에, 이미 네발로 기는 체위로 맘에 드는 남자를 마주했는데 머릿속에 무언가 들어올 리가 있겠어? 뭔가 아쉬움이라도 남기자는 생각으로 잠시 후 짐을 챙겨 도서관을 떠났지. 그 뒤로 며칠간, 그 애는 매일같이 도서관을 다녔고 나는 그 애와 어울리게 된 몇몇 한국인 남학생들에게 그에 관한 정보를 슬쩍 물었어. 일본의 공무원이었고 1년 차 연수를 나와 있다는 거야. 그래서 부탁했어. 앞으로 며칠 뒤쯤 그에게 물어봐 달라고. 괜찮은 여학생이 있는데 한번 만나볼 생각이 있느냐고. 소개팅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렸느냐고? 물론 아니지. 나는 바로 다음날 느지막이 도서관에 나갔어. 슈퍼맨이 되기 위해서 빨간 망토가 필요하듯 나 역시 남자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제복을 갖춰 입어. 뭐랄까, 그 옷만 입게 되면 유혹력이 상승한다고나 할까. 내가 꽤 매력적인 여자라는 기분에 행동도 좀 더 여유로워지고. 너도 잘 알잖아. 결국은 자세라고. 얼마나 더 예쁘고 아니고를 떠나서 스스로 매력적이라는 자신감을 갖춘 사람은 상대에게 매력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쉬워. 오후의 끝물, 도서관에 들어서서 그 애가 어디 있나 찾기 시작했어. 깊숙한 구석 자리에 앉아 책상에 얼굴을 대고 정신없이 잠들어 있더라고. 잠자는 도서관의 미남을 깨우지 않고 지나치는 일처럼 참기 힘든 일이 어디 또 있겠니? 나는 그대로 옆에 다가가서 그의 넓은 등을 슬며시 흔들었지. 일어나세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떠서 나를 올려다보는데 말했어. 가방 챙겨서 나오세요. 잠이 덜 깬 상태여서인지는 몰라도 순순히 내 말을 따르더라. 나는 도서관 출구까지 성큼성큼 걸어갔고 그는 내 뒤를 따랐어. 정문 앞에 이르자 그를 향해 돌아섰지. 그의 앞에 조금 가까이 선 뒤 내 얼굴이 그의 가슴팍에 닿는다는 것을 손짓으로 표현하며 말했어. 생각보다 키가 더 크시네요. 키 좀 확인해 보려고 했어요. 다시 들어가 보셔도 돼요. 그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길래, 까르르 웃으며 말했지. 들어가기 싫죠? 그럼, 저랑 놀래요? 날도 좋은데. 우리는 곧장 도서관 근처에 있는 아이리시 선술집에 들렀어. 맥주 한 잔씩을 시켜놓고 이야기를 나눴어. 그 애의 불어가 서툴러서 의사소통은 좀 힘들었지만, 대신 더 귀 기울여 듣고 더 크고 즐겁게 반응하며 대화를 이끌었지. 말하는 데에 자신이 좀 붙은 애는 더 신나게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지. 그거 알아? 시끄러운 장소에서 귀를 기울여 이야기하다 보면 몸과 몸이 더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는걸. 시선은 더 자주 부딪쳤고 어느덧 내 눈은 그의 머리칼 위 몇 가닥 새치에 머물렀지. “잠깐만 고개 좀 숙여봐요.”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 쪽으로 기울이자 나는 내 몸을 그에게로 더 가깝게 숙인 뒤 새치 하나를 뽑았어. 손을 내밀어 보라는 시늉을 한 뒤, 내 앞에 펼쳐진 그의 길고 커다란 손 위에 방금 뽑은 새치를 올려놓았어. 그렇게 나는 그의 새치 몇 가닥을 더 뽑았고, 좁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몸과 몸이 더욱 가까워진 덕분에 그에게 숲처럼 깊고 상쾌한 냄새가 난다는 걸 알게 되었지. 입에서 군침이 돌았어. 관능이란 그물처럼 연결된 고리 같아서 시각 혹은 후각의 자극만으로도 미각이 움직이고 온몸의 촉각마저 곤두서듯 일어서게 돼. 대화는 띄엄띄엄 이어졌지만, 온통 살아난 감각 탓인지 지루하지 않았어. 결국, 지하철이 끊길 때까지 우리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지. “소개팅은 거절하겠습니다” 밤거리를 나와서 조금 걷다가, 그를 잠시 길목에 세워두고 바로 앞에 있는 호텔로 무작정 들어갔어. 늦은 밤 택시를 부르기 위해서는 호텔 데스크에 부탁하는 것만큼 수월한 일이 없잖아. 그런데 막상 나와 보니 가로등 불빛 밑에서 무너질 듯 서 있는 그 남자가 보이더라. 이런, 그의 상상력을 너무 자극하고 만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말이야,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에 걸린 안경을 끌어내린 것뿐이었어. 그의 맨눈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나는 그의 안경을 내 입술 가까이 가져가 입김을 불어넣었어. 뿌옇게 가라앉은 안경알을 닦으며 안개 낀 창밖의 풍경처럼 그의 눈을 바라봤지. 금세 안개가 걷히고 그의 눈동자가 보이더군. 불빛을 비추면 갈색 돌처럼 반짝이는 눈이었어. 촘촘히 박힌 가느다란 속눈썹은 물풀처럼 흔들리고. 밤바람이 입술을 스치는데, 그의 날숨과 들숨이 오가는 걸 닿을 듯이 느끼는데, 생각했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말과 말 사이에 느슨하게 걸쳐 있는 침묵과 그 틈새에 흘러나오는 한숨 소리라고. 그리고 그 후의 들숨이라고. 빗소리처럼 자박자박, 나지막이 떨어질 누군가의 탄성을 떠올렸어. 빗방울이 가만히 튀기듯이, 흐르는 물 위로 가만히 퍼지듯이. 그때 택시가 도착했지. 나는 방금 상영이 끝난 영화관을 나오듯 그 순간에서 벗어나 택시에 올랐어.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손을 꼭 잡고만 있었지. 가끔은 그런 휴지기야말로 흐트러져 열광하는 감각들을 한곳에 모으게 하거든. 먼저 차에서 내리면서 그에게 전화번호를 전해 주었어. 그런 거 아니? 세상의 전화번호는 모두 다르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그에게 새로운 번호의 조합을 주고 그것을 각인시켰던 거야. 유혹은 말이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인 양 함께 하고,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곳인 양 함께 가는 것이고,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것인 양 함께 듣고 새기는 일이야. 마치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는 듯이. 그야말로 생의 감각이 폭발하듯 살아오르는, 가장 관능적인 순간이 아니겠니? 그와 내가 연인이 되었느냐고? 이것만 우선 말해줄게. 며칠 뒤 나는 소개팅을 부탁했던 그 남자의 지인에게 결과를 물었지. 그 남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니 소개팅은 거절하겠습니다.”
|
이서희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