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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
(14) 봄날의 광장으로
나의 첫번째 데이트는 버스를 함께 타는 일이었다.
처음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을 사귀는 일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헤아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첫번째 데이트를 콕 집어 지정하는 일은 어렵다만, 둘만이 사람들 틈을 벗어나 몰래 버스에 오를 때의 기분은 지금도 되살릴 수 있을 만큼 벅차고 설??? 단둘이 버스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한시간가량은 되는 여정을 함께하는데, 나의 대학 선배였던 그가 대화를 끌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질문은, 요즘 고민이 뭐니, 정도뿐이었다. 90년대 초반 학생운동권 선배들이 후배에게 다가가기 위해 던지는 질문은 비슷했다. 겨우 나보다 1년 선배였던 그의 질문 역시 더 이상의 변주는 없었다. 나는 그런 그가 조금은 지루하고 조금은 우스웠다. 차마 눈도 똑바로 못 맞추고 버스 앞머리만 쳐다보는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러는 오빠의 고민은 무어냐고. 학교에서는 대단한 선배 노릇을 하는 그로서는 갓 들어온 신입생 후배에게 듣는 발칙한 질문이 당황스러웠을까. 그는 너털웃음을 웃어 보이며 그제야 눈을 맞췄다. 그는 자주 웃었고 자꾸 어깨를 움츠렸다. 눈이 마주칠 때 알았다. 그의 눈동자가 얼마나 맑고 여린지, 그 갈색빛만으로도 내게 걸 수 있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 저토록 따스한 기운이 감돌면서도 왜 그것은 내 눈빛을 닿으면 떨리는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사람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일만으로 나를 둘러싼 풍경이 모조리 지워지는 경험을 했다. 버스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닿았을 때, 잠시 후면 그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제 막 떠나려는 버스 정류장 옆 호떡가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호떡 사주세요. 무작정 버스에서 내려 그가 사준 호떡을 한입 베어 물고 말했다.
“나는 호떡 사주는 사람이 제일 좋더라.”
일시정지. 나는 그때 한 사내의 존재가 정지된 화면처럼 내 앞에 각인되는 순간을 경험했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웃어도 마저 다 웃지 못하는 어설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말을 내뱉은 후에야 알아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없던 나의 마음도 그렇게 정리되기 시작했고 모든 사건이 한꺼번에 소급되어 결국은, 그를 좋아해서 모든 일이 벌어졌음을 이해했다. 살랑살랑 봄바람처럼 시작되었던 첫사랑이 무참하게 끝나버릴 때까지.
단둘이 버스 뒷자리에 앉아한시간을 함께하던 여정
때로는 기차 타고 종점까지
얼마나 멋진 데이트 장소였던가 호화로운 레스토랑 식사보다
더 많이 걷고 보고 함께 느끼고
경험한 이가 더 기억에 남는다
유혹의 비용은 화폐를 초월한다 데이트 비용에 관한 이야기 그다음 데이트로 우리는 서점에 갔다. 학생회 일로 바쁜 그와 남들 눈을 피해 학교를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대기조처럼 그를 기다렸고 그의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뒤를 좇았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라 그를 구성하는 세계였다. 그러므로 그가 내게 전부를 할애하지 않는 것은 그를 더 사랑하는 이유가 되었다. 나 역시 그와 그의 세계를 품을 만큼 성장하고 싶었다. 사랑의 시작은 그토록 경이롭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겹치고 함께 커져가며 풍경을 바꿔가는 일이다. 처음으로 오후를 함께 통째로 보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가 제안했다. 객관식 출제고사 세대답게 네개의 보기를 주었다. 나는 4번을 택했다. 기차 타고 종점까지 가기였다. 마침 우리 곁에는 도심을 지나가는 기차 레일이 보였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가장 긴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오르면 어쩔 수 없이 내내 같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만큼 매력적인 것은 없었다. 그와 함께 단 한번도 가 보지 않은 어느 소도시에 내렸다. 이미 해는 기울기 시작했고 종점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차를 타지 않으면 제때에 집에 갈 수 없을 터였다. 우리는 종점에 이르지 못하고 여정을 멈추었다. 기차역을 빠져나와 그는 나와 함께 역사를 마주보며 말했다. 자, 여기가 문산역이다. 잊지 마라. 그에게도 처음인 곳이라고 했다. 얼마 전 삼십대 초반 청년을 만나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 데 따르는 남자의 부담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남자가 써야 하는 시간과 비용은 실제 그들이 감당하기에 부담스러운 수준이 될 때가 많다고 했다. 그것을 당연히 요구하는 여성들에 대한 불만도 들었다. 그의 20대 시절, 많은 또래 남성들은 여자를 만나 밥을 사고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유혹이 진행되고 있다고 믿었다 했다. 막상 상대 여자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시간 보내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허탈감은 때로 분노가 되기도 했다. 출혈이 큰 만큼 기대 수준도 높아지지만, 20대 청년이 쓸 수 있는 비용이란 객관적으로도 대단한 수준은 못 되었고 그것을 통해 여성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계획이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각종 기념일과 분위기 좋은 식당과 화려한 물건들이 진열된 세상에서 유혹의 비용은 까마득히 올라가 버린 듯이 보인다. 유혹에 드는 비용을 화폐로 환산할 수 있을까? 적어도 데이트를 하는 데에 드는 비용은 듣기만 해도 상당하다. 만나는 데 드는 차비는 제하더라도, 함께 밥을 먹어야 하고 보통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다고 하니 극장표도 사야 한다. 둘 중 한명이라도 독립된 주거공간을 가지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빠르지 않은 한국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잠자리를 함께 하기 위해서조차 공간을 빌려야 한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데이트 비용은 젊은이들을 좌절에 몰아넣을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챙겨야 할 기념일도 적었고 간단한 정성의 표시만 교환해도 섭섭하지 않을 만큼의 사회적 분위기도 조성되었다. 연인들은 함께 많이 걸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같이 하고 우거진 숲의 으슥한 틈을 찾아 입을 맞추었다. 졸업 후 프랑스라는 나라로 유학을 갔을 때에는 젊은이들의 연애복지천국을 경험했다. 대학 등록금은 몇십만원 수준이었고 학생을 비롯하여 소득 수준이 낮은 이에게는 집세의 절반 이상이 정부 보조로 해결되었다. 온갖 영화관은 물론이고 미술관 등의 문화시설은 학생을 비롯한 젊은층에게는 저렴한 가격의 회원제로 제공되었다. 거리 곳곳에 자리잡은 공원은 계절에 따라 새로운 데이트 코스가 되었다. 주차 공간을 찾기 힘든 오래된 도시를 차를 타고 이동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대중교통 이용료 역시 엄청난 할인을 받았다. 애정 표현도 자유로워서 길에서 입을 맞추는 커플을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그곳을 이상화하려는 생각은 없다. 다만, 두 나라를 거쳐 다양한 연애를 해본 아줌마로서 고백한다. 호화로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남자보다 더 많이 걷고 보고 함께 느끼고 경험한 남자가 더 기억에 남는다. 가진 것을 미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보다, 나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준 사람이 더 매혹적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를 만들고 가꾸고 넓혀 나간다. 유혹은 그 세계가 만나고 연대하고 때로는 중첩되고 확장되는 경험이다. 연애의 경험이 벅찬 이유는 천지가 개벽하고 세계가 새롭게 열리는 것을 온 존재로 다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립된 밀실을 전제로 한 유혹은 결국 막다른 골목에나 이를 뿐이다. 더는 갈 곳이 없어진 뒤 남은 일은 서로를 갉아먹고 파괴하고 소진하는 거다. 그러므로 유혹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편이 좋다. 광장은 멋진 데이트의 장소이다. 광장으로 나아가는 유혹과 연애 봄이 막 시작되는 1학년, 대학 교정의 어느 벤치에 앉아 그에게 물었다. “나는 왜 끊임없이 살아 있다는 걸 느끼면서 살지 못할까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시간이 무심코 흘러감을 견딜 수 없던 나날이었다. 순간순간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확인하고 싶어 안달했다. 그가 대답했다. “헤엄을 잘 치는 물고기는 물속에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지 몰라. 스스로 물속에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자각하고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물에 빠지고 있는 순간일지도 모르잖니.”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언젠가 물살을 가벼이 가르며 유유히 헤엄치는 날들이 찾아올까. 물속에 있는지 혹은 대기를 날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으리만큼, 내 존재로부터 자유로운 날들이 올까. 적어도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날 우리가 거리로 나가 도로 한복판을 달렸을 때, 세상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구호를 외쳤을 때, 그의 손이 최초로 내 손을 쥐고 나를 좀더 깊숙이 세상 속으로 이끌었을 때, 나는 자유롭다고 느꼈다. 사람도 세상도 변화하는 것이 이치이다. 그리고 함께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나뿐 아니라 세계의 변화를 끌어안고 참여한다고 느낄 때 인간은 가장 자연스러운 존재가 된다. 세계의 고통을 나의 불행으로만 이해하고 혼자 침잠하고 있을 때, 나는 허우적거린다. 내게는 광장에서 그의 손을 마주잡은 이른 봄날이, 그가 사준 호떡을 베어 문 순간으로부터 소급된,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순간이기도 했다. 부디 광장으로 나아가는 유혹과 연애를 하길 바란다. 함께 세계를 열고 변혁하고 모두가 성장하는, 그래서 유혹의 비용이 화폐로부터 조금은 더 자유로운 세상으로 다가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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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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