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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
(15) 유혹의 재구성, 관찰
어느새 5월입니다. 당신과 내가 처음으로 마주친 그날 역시 5월의 화창한 날이었지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지중해의 바람이 몰려와 내 파란 셔츠 깃을 휘날리게 했어요. 나는 그때 친구와 함께 파리의 어느 아랍인 가방 가게에서 산 새파란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넉살 좋게 가격을 깎아주었고 값을 치르고 가게를 나온 내게 말했지요. 이 가방을 끌고 가면 가슴 뛰는 인연을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친구의 말은 주문이 되어 나를 당신에게로 이끌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칸의 기차역을 걸어 나와 크루와제트 대로 한복판을 걸어오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기묘한 우연의 연속이었죠? 비행기 표를 바꿔 이틀을 더 머물기로 한 당신의 결정도, 가지 않겠다던 숙소 위층 술자리에 억지로 끌려갔다 당신을 만난 것도, 내가 머물게 된 방이 알고 보니 당신의 옆방이었던 것도요. 우선 우리가 다시 마주친 그날의 술자리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노크는 필요합니다
짐을 풀고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갔어요. 만일 당신이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알았다면 나는 아마 옷을 갈아입지 않았을 거예요. 화장을 지우지도 않았을 거고요. 간단히 인사만 하고 내려올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테이블 주위로 모여 있는 십여명의 사람들 틈에서 당신의 얼굴을 보았어요. 내가 당장 다가가기에는 너무 먼 자리, 길게 놓인 테이블 맞은편에 당신이 앉아 있었습니다. 미국인과 재미동포들이 대부분이어서 모두들 영어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나 혼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켜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세요? 오랜 프랑스 유학 생활로부터 배운 것은, 어디에 있든 누구를 만나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으라는 것이었어요. 나는 미소를 짓고 머릿속으로 되뇌었지요. 나의 다른 문화와 생김새는 오히려 나를 더 돋보이게 할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능숙한 외국어 실력이 아니라 여유로운 자세이다. 마침 모인 사람들 중 한국어가 익숙한 지인이 있었지요. 그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반가운 듯 다가가서 한국어로 말을 걸었어요. 이야기가 진행되자 밝게 웃고 적당한 몸짓을 섞어가며 대화에 몰입했지요. 물론, 당신이 나를 알아봤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했다면 그 자리에 남아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나를 바라보던 당신의 수줍은 눈길을 대화 내내 어깨너머로 느낄 수 있었으니 더욱 그곳을 떠나는 일은 힘들어졌지요.
안타깝게도 당신은 나와는 너무 먼 곳에 앉아 있었어요. 하지만 서두르지 않았어요. 당신의 시선이 내게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알고 있나요? 인간의 동공은 카메라 렌즈와도 같아서, 빛이 부족하면 조리개를 열고 넘치면 닫지만, 시선을 끄는 대상이 있을 때에도 열리고 확장된다는 것을. 눈빛은 자꾸만 길어지고, 그렇게 길을 내지요. 그 고요한 시선은 자꾸만 자기가 낸 길로 돌아오고 마는 숙명을 짊어지고요. 내게로 옮겨오는 당신의 눈빛이 길고 잦아질수록 온몸의 신경이 예민하게 살아 올랐습니다. 일부러 화장실을 찾아가는 동안에도, 내 넓은 시야는 맞은편에 있는 당신의 눈길이 나를 따라 은밀히 열리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기회를 준 거였어요. 나를 충분히 파악하고 각인할 시간을 제공한 거죠.
숙소 위층 술자리에 끌려당신을 만난 5월의 어느날
테이블 끝자리에 있었지만
어느새 내 옆자리에 앉아… 망설임과 결심 오가는 미묘한
유혹의 거리를 가늠하는 일은
섬세한 관찰을 통해 가능하죠
그것은 시선의 춤과 같아요 자, 그럼, 그때의 당신에 대해 말해볼까요? 당신은 그곳에 있던 여자들에게 절대적 관심을 받는 대상이었어요. 그녀들의 어깨는 당신을 향해 돌아가 있었고, 테이블의 가장 끝 중심에 앉아 있던 당신은 그녀들에게 공평히 대화를 분배하고 있었지요. 나는 아마도 당신에게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여자였을 거예요. 그리고 단 한번도 말을 걸지 않은 여자이기도 했고요. 그러나 당신의 발끝은 언제나 내가 움직이는 쪽을 향해 있었어요. 그걸 연거푸 확인한 순간, 나는 당신이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먼저 활발히 움직이는 역할을 수행했지요. 그때까지 자기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던 사람들도 부담 없이 자리를 옮겨가게 되었고요. 내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당신의 몸이 들썩였던 걸 아세요? 잠시 후 나는 일부러 내 팔이 닿지 않는, 테이블 중간에 놓인 치즈 플레이트를 향해 손을 들었어요. 팔을 미처 뻗기도 전에, 저 멀리 맞은편에 있던 당신이 일어나서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 놓았습니다. 그때 확신했어요. 조만간 당신이 내 곁에 오리라는 걸요. 그리고 모두들 잠자리로 떠나갈 때까지 당신은 내 옆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나와 함께 마지막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당신의 바람을 내가 받아들일 때까지. 사람들은 종종 유혹의 기술에 대해 말하지요. 나는 당신과의 경험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유혹은 관찰에서 시작된다고요. 사람은 그다지 무모한 존재가 못 되어서, 대체로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는 상대에게 더 신경이 쓰이게 마련이지요. 만약 상대에게 자신도 호감을 느끼고 있다면, 적당한 순간에 반응하여 함께 확인하는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그리고 순간을 찾는 것은 바로 관찰에서 시작됩니다. 다가오는 속도에 맞춰 거리감을 조절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망설임과 결심이 오가는, 미묘한 유혹의 거리를 가늠하는 일은 섬세한 관찰의 힘을 얻는다면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어요. 그것은 시선의 춤과 같지요. 오가는 눈빛이 길을 냅니다. 그 길은 내밀하고 울창할수록 더 오래 마음을 잡아둘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거침없이 뻗은 길은 되돌아가고 싶게 만들어요. 두려움을 자극하거든요. 보호받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하고요. 차라리 속살을 엿보이듯 우거진 숲을 열듯 둘만의 산책을 유도하듯 오솔길을 내는 편이 좋아요. 자, 이제 두 몸이 가까워질 시간입니다. 과격한 다가감이나 갑작스런 질주는 유혹의 비밀스러운 매력을 살리기엔 적당하지 않아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인상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는 모두, 제각기 고유한 방어벽을 두르고 있는 존재입니다. 노크는 필요합니다. 벨을 울려도 좋아요. 혹은 열린 틈으로 가벼운 손짓을 내보이는 것도요. 문을 열고 들어설 때를 놓치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내가 좀 더 당신에게 가까운 치즈 플레이트에 손을 뻗었던 것처럼, 당신의 손이 접시를 옮겼던 것처럼. 그리고 어느새 당신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죠. 도와줄래요? 우리가 다음날 새벽이 될 때까지 나눈 대화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당신도 알다시피 그때 내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어요. 당신은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배운 한국어 몇개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고요. 그럼에도 당신은 끈기 있게, 천천히, 또박또박 이야기를 붙였어요. 우리가 이미, 같은 날 길에서 마주친 사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요. 내가 띄엄띄엄 영어로 말을 이어갈 때마다 집중했고, 단어를 찾기 힘들어 머뭇거릴 때마다 숨은 보물 찾듯 말을 찾아주었지요. 나는 당신이 찾아준 말을 세상에 둘도 없는 물건처럼 소중히, 열렬하게 받았습니다. 내 입술에 물고 웅얼웅얼 담았다가 당신에게 흘려보냈지요. 당신이 꺾어준 새로운 언어들이 입에서 피어날 때마다, 당신은 단어 속 흐트러진 호흡마저 놓치지 않을 듯 귀를 기울였어요. 그때마다 당신의 넓은 어깨는 왼편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기울었어요. 당신을 흘기듯 수줍게 바라보던 나의 시선은 차츰 또렷이 살아 올랐지요. 내 얼굴을 차마 정면으로 오래도록 바라보지 못하고 바닥 어딘가로 가끔씩 떨어지던 눈빛은 어느새 눈동자 가득 나를 담았고요. 나는 당신의 눈동자에 담긴 내 모습을, 마치 제 집을 찾은 아이처럼 느꼈어요. 그래서일까요? 당신이 내게 속삭이는 이국의 말들을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것만 같았어요. 당신이 훗날 고백했던,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웃음도 더 편안히 웃을 수 있었고요. 우리는 어느새 몸을 서로에게 기울인 채 마주보고 있었죠. 내가 그만 음식을 떨어뜨려 입고 있던 하얀 치마에 자국을 남긴 일은 기억하나요? 당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가서 물수건을 가져왔죠. 쉽게 지워지지 않는 얼룩에 당황하는 내게 당신은 말했어요. 당신은 운이 좋아요. 나는 얼룩을 지우는 데에는 전문가랍니다. 무릎을 꿇고 물었지요. 괜찮다면 도와줄 수 있을까요. 그렇게 최초로 우리의 손이 닿고 당신의 손길이 내 허벅지를 살짝 스쳤습니다. 소란스러운 실내의 소음도, 사람들의 시선도 한꺼번에 지워졌던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둘만 두둥실 떠올라, 진공의 크리스털 볼 속에 빨려 들어간 기분이었죠. 둘만 남은 듯 사위가 적막해진 찰나, 당신이 입술을 열었어요. 자, 다들 잠자리에 들면 어떨까. 정리는 나한테 맡겨둬.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내게 물었죠. 도와줄래요?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자 나를 소파에 앉히며 말했어요. 내가 다 치울게요. 내일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 거라는 약속만 해주세요.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이며 대답했죠. 그렇게 해요. 대신 잠든 나를 깨워주세요. 아침이 되면 내 방문을 두드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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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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