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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6.12 19:15 수정 : 2015.06.13 15:48

[토요판]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
(18) H이야기 2

둘째 아이 모유 수유를 끝내고 한숨을 돌릴 무렵에야 거울 속의 나를 쳐다볼 여유가 생겼다. 연이은 새 생명의 탄생과 성장의 경이로움은 나를 압도했다. 둘째를 유아원에 입학시키고 약간의 시간이 주어지자 어떤 의문이 자꾸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아직 여자일 수 있을까? 엄마가 아닌, 그냥 여자로서 누군가는 나를 바라봐줄 수 있을까? 두 아이의 엄마이고 삼십대 중반, 여자로서의 자의식마저 흐릿해진 채 육아와 살림으로 보내버린 결혼 6년 뒤 내 모습은 반투명에 가까웠다. 나를 지나쳐 남편이 보였다. 아이들이 보였다. 나는 그들이 통과해가는 경유로 이상은 아닌 것 같았다. 혼자 바깥에 나가본 적은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하기만 했다. 그때 마침 어머니가 미국을 방문했다. 내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바람 좀 쐬고 오거라. 아이들은 내게 잠시 맡기고. 프랑스 안 가본 지 벌써 6년이지? 한번 다녀오면 어떻겠니?

귀환을 알린 친구는 단 세 명이었다. 함께 유학생활을 시작했던 친구 N, 어느 곳인가 잠들어 있을 J, 그리고 J의 묘소로 안내할 H. 용기가 나지 않아 머뭇거리다가 미국으로 떠나기 이틀 전에야 H를 만나 J를 찾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어제 헤어진 듯 6년 후의 거리를 함께 떠돌았다.

삼십대 중반, 아이의 엄마
나는 아직 여자일 수 있을까
바람 쐬러 떠난 파리의 묘지에서
H에게 엄마의 여성성을 물었다

“완경 이후 여자들이 오히려
못 견딜 만큼 유혹적이라 생각해”
긴 세월 거쳐 노인 되고 비로소
맞는 순수한 관능의 향연이란

아이와 엄마로 넘치는 도시의 풍경

묘소를 지나 다다른 곳은 뤽상부르 공원이었다. 내가 기억하던 공원의 모습은, 연둣빛이 돋아나는 봄이나 뜨거운 한낮의 여름이 배경이었다. 서른 중반이 되어 돌아와 보니 초겨울 무채색의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흐린 잿빛 하늘을 담고 있는 호수의 물빛 위로 하늘을 갈라내듯 쭉 뻗어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습기와 건조의 오랜 반복 끝에 껍질만 남아 굳어버린 듯, 마르고 단단한 질감이 눈으로도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아득하게 이어진 나무들의 빽빽한 율동을 바라보았다. 짙고 고집 센 고동빛으로 간략해져 버린, 끝을 가늠할 수 없이 되풀이되는 음표들이 기묘한 화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춥고 눅눅한 날씨에도 공원 안을 거니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산책하는 여인들이나 느린 걸음걸이로 풍경 안으로 사라질 듯 띄엄띄엄 나아가는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디를 가든, 엄마와 아이들이 있었다. 파리라는 도시가 이토록 많은 아이와 엄마로 넘치는 줄을 오래전에는 알지 못했다.

-엄마가 된 이후부터는 세상 풍경마저 달라진 듯해.

어느덧 공원 안을 크고 둥글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원을 그리다 잠시 멈춰 서서 H를 바라보았다. 그의 존재가 엄마가 된 나를 둘러싼 풍경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 낯설었다.

-엄마가 된 너를 옆에 두고 걷는 나에게도 파리의 풍경이 달라 보여.

-어떻게?

-아, 이곳에 이렇게 엄마와 아이들이 많았구나. 그리고 세상의 엄마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진심으로 엄마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갖 영양분을 아이들에게 내주고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거칠어진 그녀들이?

-여성성이 엄마가 되면서 더욱 무르익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 젊고 탄탄하고 무책임한 것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야.

-주변을 둘러봐. 나이 든 남자들이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어떻게 소비하며 살고 있는지. 선택권에서조차 소외되어 버린 여자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이제는 보여. 그것을 보게 된 순간 찾아드는 것은 두려움이야.

-나는 말이야, 완경 이후의 여자들이 못 견딜 만큼 유혹적이라고 생각해. 생식능력을 덜어내고 온전히 성적 존재로 살아남은 거잖아. 어쩐지 순수하게 관능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임신의 걱정 없이 자유롭게 섹스를 할 수 있다는 거잖아.

나는 예상치 못한 H의 대답에 웃음을 터뜨렸다. 반박하고 싶지 않을 만큼 그럴듯한 대답이었고 덕분에 내 기분은 조금 유쾌해졌다. 그래도 추궁하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이제 갓 서른이 된 청년일 뿐이었다.

-그래서, 단 한 번이라도 완경 이후의 여성과 섹스해본 적이 있어? 그녀들의 저항할 수 없는 매력에 이끌려서 그들을 유혹해본 적이 있느냐는 말이야.

-남자들이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고 직접적이지 않다는 것만 알아줘. 사랑에 빠지게 하고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장치는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말이야. 나는 관념적인 메타포 없이는 사랑에 빠질 수가 없어. 사랑은 은유와 같아. 그래서 허상이기도 하지만. 내 안에서 어떤 은유가 성립될 때에만 상대를 사랑과 정념의 시선으로 온전히 바라보게 된다는 거야. 그렇게 되기까지 많이 혼란스럽기도 하고 가끔은 그게 고통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야.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꾸만 초조해졌다. 마지막 장을 미처 읽지 못한 책을 억지로 덮어 책장에 꽂아두는 기분이었다. 우리의 발걸음은 자꾸 빨라지고 있었음에도 차마 공원 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출구 근처를 맴돌았다. 가까스로 공원 뒷문으로 빠져나와 라스파유 대로까지 걸어 들어왔다. 그를 보내야 했다. 나는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대로 한가운데에 멈춰 서서 작별인사를 고했다. 그는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줄기차게 사람들이 지나가고 우리는 그 안에서 정지된 채 머뭇머뭇 이별을 했다. H가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 워낙 이상한 사람들이 많은 도시잖아.

-너도 나도 충분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 도시에 어울릴 만큼.

그가 활짝 웃어 보였다. 그가 팔을 열어 내 어깨를 쥐고 프랑스식으로 인사했다. 그의 입술이 내 볼 위로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매끄럽고 차가운 느낌이 간지럽게 지나갔다. 마지막 인사를 마친 뒤 그는 좁은 골목길로 빨려 들어갔고 나는 대로를 따라 걸어갔다. 뿌리치듯 단호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나의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파리의 초겨울이 한숨처럼 아름다웠던 까닭이었다. 거리는 빛을 잃고 어두웠지만, 가로등도 차의 주행등도 켜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때를 종잡을 수 없는 오후, 두꺼운 구름 속에 꽁꽁 숨어 들어간 햇빛은 밖으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풍경들이 정지된 관념처럼 다가왔다. 나는 자꾸 걸을 수밖에 없었다. 멈춰진 풍경 속을 뚫고 지나가야만 했다.

젊음과 연관된 아름다움에 집착할 필요 없어

에리크 오르세나의 소설 <오래 오래>의 주인공인 원예사 가브리엘은 군더더기 없는 기하학과 잠들어 있으나 오롯이 느껴지는 생명의 위대한 현존 때문에 겨울의 정원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한다. 나무들이 잎의 위장을 벗고 알몸을 드러내고 그 뼈대와 얼키설키한 선들, 느닷없는 굴곡, 뒤틀림의 흔적, 상흔 따위를 속속들이 보여준다고 한다. 나아가 겨울의 정원은 창조한 사람의 참뜻을 드러낸다고 덧붙인다. 라파엘 전파의 매끄러운 그림보다 에곤 실레의 마르고 뒤틀린 형상에 매혹되는 나를 떠올려 봐도 세상에는 생각보다 더 다양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유혹은 젊음과 연관된 아름다움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소멸하는 것의 아름다움은 현기증이 날 만큼 경이롭다. 오르세나의 소설 속 주인공 남녀는 긴 세월을 거쳐 노인이 되고 비로소 “순수한 관능의 향연”에 도달한다. 그것은 젊음의 향연과는 달리 평안하고 겨울나무처럼 간결하되 본질적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나의 나이듦을 기대하기로 했다. 어쨌든, 이토록 늘어난 평균 수명에 우리가 젊다고 일컫는 나이대는 너무 짧은 것은 아닌가. 좀더 천천히 성숙해져도 될 인생의 여정이다.

며칠 전 우리 집 뒷마당에 앉아 가까운 후배와 와인을 마셨다. 초저녁 햇볕이 여전히 뜨거웠다. 나와는 달리 꽤 차이 나는 연상의 남자들과 데이트한 경험이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나이 든 남자의 매력이 뭐야?

-데카당 한 부분이 있어요.

-나이 든 여자도?

-그럼요.

나는 다시 에곤 실레의 그림 속 기묘한 아름다움을 떠올렸다. 마른 겨울나무의 위엄과 차가운 표면 속 뜨겁게 품은 생명을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잎사귀가 우거진 사십대이다. 언젠가 모든 것을 떨구게 될지라도 두렵지 않다. 간결해지는 중이고 그것은 새롭게 아름다워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수수 떨어지는 것, 거칠거나 늘어지거나 주름지는 형상 위로도 유혹의 순간은 지나갈 것이다. 유혹은 때로 세월을 품으며 깊어진다.

이서희
이서희

▶이서희 결혼 전이나 후나 다른 남자(그리고 여자)가 많이 궁금한 여자. <관능적인 삶>이란 책의 저자. 법학도의 탈을 쓰고 영화와 인문학 주변을 맴돌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와 마음껏 놀았다. 결혼 후 미국에서 12년째 살고 있고, 장차 나와 당신을 함께 발견하고 이해하는 어른들의 학습놀이 공간 ‘유혹의 학교’를 열고픈 꿈을 갖고 있다. 지면으로 먼저 시작하는 ‘유혹의 학교’는 격주 연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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