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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6.26 19:13 수정 : 2015.06.27 14:17

[토요판]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
(19) 사랑의 지도

어릴 적 집에 혼자 남아 보는 티브이는 짜릿했다. 몰래 보는 티브이에서는 자극적인 장면이 많았다. 안방을 독차지하고 이리저리 뒹굴면서 보게 되었던 몇 편의 방화는 그중 발군이었다. 서로 협약이라도 맺은 듯 유사한 장면이 등장했는데, 시대 배경과 배우의 얼굴만 다를 뿐 뒤바꿔 쳐도 내용에 별다른 지장을 줄 것 같지 않았다.

낯설고 후미진 공간, 갈 곳 없이 내몰린 여주인공은 남자의 공격 대상이 된다. 예상치 못한 덮침에 당황한 여주인공은 반항도 해 보지만 속수무책 무너질 따름이다. 장면은 남성이 여성의 옷을 난폭하게 찢어발기는 순간 잘려버렸다. 팽팽히 서 있던 긴장감도 툭, 끊어지듯 풀렸다. 깊은 밤은 밝은 대낮으로 바뀌었고 영화 속 시간은 평온한 리듬을 되찾았다.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훌쩍 건너뛰어버린 두 장면 간의 아찔한 거리에 번번이 허탈해졌다. 홀연히 사라져버린 시간이 내게 남긴 것은 두께를 측정할 수 없는 어둠이었다. 애타게 두드려 보아도 열릴 것 같지 않은 어둠 앞에서 나는 이리저리 서성일 따름이었다. 그대로 손을 털고 나아가기에는 아쉬움이 컸고 문을 열어젖힐 용기는 갖고 있지 않았다. 결국 은밀한 공간 안에 남은 두 남녀로 돌아갔다. 그리고 실종된 장면을 고민하지 않고도 최대한 오랜 시간 흥분을 지속시킬 방법을 궁리했다. 나는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그녀의 옷을 벗기고 찢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세상 어느 곳, 그들도 그녀들의 옷을 찢고 있을까. 그렇다면 매일 밤 찢어발겨지는 그 많은 옷을 다들 무슨 수로 마련하는 것일까.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있는 날은 어떻게 하지? 고민 끝에 어릴 적 읽었던 그림동화 속 어부의 딸이 그물을 몸에 칭칭 두르고 임금님을 찾아가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 뒤부터 내 머릿속 매일 밤 상영되는 영화 속 여주인공에게 그물로 된 옷을 입혔다. 옷감의 불필요한 낭비를 막는 것은 물론, 장면의 긴장감도 오래 유지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아, 전나체가 되어 드러누웠다!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간다. 난폭한 동작으로 그녀를 휘어잡는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그물 옷을 바라본다. 집요한 손짓으로 그물 옷을 한 코 뜯어낸다. 다음은 그 옆의 그물코 차례이다.’

촘촘히 이어진 그물망을 여기저기 뜯어내다 보면 그 후에 벌어질 일을 고민도 하기 전에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러나 나의 그물 옷 놀이도 며칠을 가지 않아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아버지의 책꽂이에서 뽑아들었다가 늦은 밤 이불 밑에서 숨죽이고 읽었던 김동인의 소설 <약한 자의 슬픔> 초반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글귀 때문이었다.

아까 저녁 먹을 때에 남작의, “오늘 밤에는 회(會)가 있는 고로 밤 두시쯤 돌아오겠다”는 말을 들은 엘리자베트는, 별로 안심이 되어 자리를 펴고 전나체가 되어 드러누웠다.

‘엘리자베트는 전나체가 되어 드러누웠다’라는 문장을 도대체 몇 번을 되풀이해서 읽었을까. 세상에, 알몸으로 잠자리에 들다니. 그렇다면 찢을 옷도 없이, 밤부터 날이 밝을 동안의 그 긴 시간, 남녀는 무슨 짓을 하며 보내는 걸까. 내 사춘기가 시작되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제는 나의 첫째 딸이 그때 내 나이가 되었다. 그녀는 엄마와는 달리 남녀가 옷을 벗은 뒤에 하는 행위에 관한 구체적 지식을 갖고 있다. 학교에서 체계적 방식으로 교육받았고 내용은 부모에게 공유된다. 성과 사랑, 연애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아이들과 나누는 대화 중 자연스럽게 포함된다. 딸 둘의 엄마로 살다 보면 내가 여자로서 살아왔던 세계를 그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바람은 더욱 절실해진다. 얼마 전부터 함께 보기 시작한 한국 드라마는 내 어릴 적 몽상을 씁쓸한 뒷맛과 함께 회상하게 했다. 그 시절의 나는 꽤 오랫동안 남녀의 성관계는 강간의 다양한 형태로만 존재한다고 믿었다. 아무도 성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 환경 속에서 내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창구는 협소했고 그를 통해 접하는 지식은 왜곡되었다. 나를 경악하게 했던 것은,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세월 동안 한국 드라마의 서사는 여전히 공격적인 남성과 성에 대한 무지한 태도를 고수하는 여성을 중심축으로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엄마, 저건 폭력이에요. 왜 저렇게 못되고 버릇없는 남자를 좋아하는 거죠? 드라마 속 여자는 대체로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존재로 묘사된다. 남자도 다르지 않다. 어쩌다 보니 의도치 않은 열망에 빠져버린 자신을 깨닫고 당혹스러워한다. 혼돈은 폭력으로 분출된다. 내가 왜 너를 이토록 갈망하는지 알 수 없지만, 욕망을 통제할 수 없고 이 모든 것은 내가 아닌 네 탓이라는 논리이다. 허접하기 짝이 없는, 왜곡된 성폭행의 논리가 연애에도 적용되다니 끔찍하지 않은가.

공격적 남성, 성에 무지한 여성
남성은 욕망 통제하지 못하고
혼돈은 난폭한 결말을 맞는다
그 진부한 서사는 폭력일 뿐

사랑은 무력하게 빠져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의지적 실천
사랑과 유혹의 정의와 기술은
공동체 안에서 배워야 할 것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문화평론가인 벨 훅스는 그의 저작 <올 어바웃 러브>에서 ‘사랑의 신비화’에 따른 문제점을 지적한다. 우리 사회는 사랑에 대한 공통의 정의를 거부하고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려 한다. 사랑은 사적 관계라는 포장에 싸인 채 그 의미가 신비화된다. 나아가 각각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사랑’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부모는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를 부당하게 처벌하고 애인은 사랑하기 때문에 난폭행위를 저지르고 함께 용인한다. 이는 사랑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다. 개인의 아집과 탐욕에서 나온 것이고 마땅히 그 잘못을 물어야 한다. 벨 훅스는 스콧 펙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사랑을 정의한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자아를 확장하려는 의지’라고. 그리고 사랑은 반드시 의도와 실천을 필요로 하고 실제로 행할 때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무력하게 빠져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의지적 실천이 되어야 한다. 사랑의 정의를 사회가 함께 공유하고 그 기술을 공동체가 함께 배우고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혹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비화된 사랑의 정의 속에서 유혹은 과도하거나 왜곡된 힘을 부여받는다. 나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의 흑마술과 같이 신비화된다. 유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행위이다. 노력한다면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모양새를 띨 수 있다. 유혹은 폭력과는 다른 과정을 취한다. 폭력은 원하는 것을 자신의 비용이 아닌 상대의 비용으로 더 즉각적으로 그러나 피상적으로 강제하는 행위이다. 유혹의 과정은 훨씬 더 지난하고 때로는 피로하다. 실패율 또한 높다. 내가 치러야 할 비용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감수하고 나아가 즐기며 아름다움까지 창조하는, 생명의 진화과정 중 일부이다. 살아있는 것들의 본질적 행위이자 함께 나아가는 힘이자 운동이다.

벨 훅스의 ‘올 어바웃 러브’

나는 종종 아이들에게 ‘사랑의 지도’ 이야기를 들려준다. 17세기 프랑스 살롱 문화의 대표주자이자 소설가였던 마들렌 드 스퀴데리의 ‘맵 오브 탕드르’(Map of Tendre)를 인용하며, 사람의 마음에 이르는 길에는 지도가 있고 그 지도는 누구에게나 존중받아야 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예전에 프랑스에 살던 한 여자는 ‘토요회’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재밌는 사람들과 흥미로운 놀이를 했어. 바로 ‘사랑의 지도’ 놀이란다. 그녀는 자신의 왕국을 ‘탕드르’라고 불렀고 그곳에서 환영받는 사람이 되려면 지도를 잘 보고 맞는 길을 따라와야 한다고 말했어. 사랑과 우정이 넘치는 그 영토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놀이를 했어. 때로는 적절치 못한 방식으로 다가오는 사람이나 매력적이지 않은 접근 태도를 볼 때 그녀는 지도상의 한 부분을 들어 말할 수 있었지. ‘이런, 당신은 방금 무관심의 영토로 발을 디디셨군요.’ 내 생각에 사람들은 살면서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각자의 지도를 만들어 가게 돼. 누군가에게 마음 깊이 다가가고 싶다면 그 지도를 읽고 존중하고 따라갈 줄 아는 지혜의 눈과 배려의 몸이 필요하단다. 자칫 길을 잘못 들어서면 우리는 무관심의 샛길이나 경멸의 늪으로 발을 헛디딜 수도 있어. 사람의 마음은 그런 거야. 한없이 넓고 포근한 땅이지만,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려면 지켜야 할 것이 많아. 그리고 잊지 마. 너희들도 태어남과 동시에 그와 같은 지도를 만들어 가게 된 거야. 알다시피 지도는 혼자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야.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고 함께 나누면서 진행하는 공동작업이거든. 너희들이 부디 멋지고 기쁨이 넘치는 영토를 그리는 지도를 만들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여기서 여성운동가 벨 훅스의 말을 집어넣는다. 물론 출처는 밝히고서. 아이들이 훗날 엄마의 말인 양 은근슬쩍 인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여행을 할 때 원하는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스케줄을 짜고 지나칠 곳을 지도에 표시해야 하듯이, 사랑을 향해 떠나는 여행에서도 우리를 안내해줄 지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우리가 사랑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벨 훅스, <올 어바웃 러브> 중에서)

이서희
이서희

▶이서희 결혼 전이나 후나 다른 남자(그리고 여자)가 많이 궁금한 여자. <관능적인 삶>이란 책의 저자. 법학도의 탈을 쓰고 영화와 인문학 주변을 맴돌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와 마음껏 놀았다. 결혼 후 미국에서 12년째 살고 있고, 장차 나와 당신을 함께 발견하고 이해하는 어른들의 학습놀이 공간 ‘유혹의 학교’를 열고픈 꿈을 갖고 있다. 지면으로 먼저 시작하는 ‘유혹의 학교’는 격주 연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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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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