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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
(20) 날씨의 취향, 남자의 취향
감정이 과잉된 서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는 많이 달라졌지만, 내가 자라면서 접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은 노골적으로 슬픔과 감동을 강요했다. 절체절명의 선택 앞에 놓인 가련한 주인공, 창작자의 가학성을 의심하게 하는 고통의 퍼레이드는 불편함을 넘어서 분노를 일으켰다. 어설프게 분석해 보면, 폐쇄적 공동체주의가 강요하는, 끈끈한 관계망과 그에 따른 의무는 자유롭고 느슨한 성향의 나를 몸서리치게 했고 감정과잉의 서사에는 매번 그 숨막히는 징후가 읽혔다.
반면 스타일의 과잉은 나를 매혹했다. 건조하고 양식화된 대사, 강렬한 명암의 대비, 일그러진 형상들로 가득 찬 표현주의 영화와 필름 누아르의 세계는 나를 사로잡았다. 감각의 과잉은 때로 한계를 실험하고 밀고 나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극단의 스타일이 도달하는 기괴함에는 한없이 에로틱한 것이 있었다. 표현주의 영화 속 흡혈귀에서 필름 누아르 속 창백한 냉혈한들에게까지, 고통은 스타일을 완성하는 장치의 일부가 되었다. 비릿한 피의 암시에는 관능의 극단으로서의 파멸이 있었다. 죽음은, 고통의 완벽한 소멸을 뜻한다. 그러므로 궁극의 쾌락이다. 뱀파이어는 여인의 목을 물어 죽음을 전염시키고 생사의 번뇌를 종식시킨다. 그리고 죽음을 알지 못해 영겁의 번뇌를 끌어안은 흡혈귀 또한 강렬한 빛의 제의로 소멸을 맞이한다. 필름 누아르는 주인공의 파멸로 막을 내린다. 그들은 가장 멋지게 죽기 위해 정교히 죽음의 순간을 연출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성적 충동과 죽음 본능이 교차하는 이러한 영화들을 통해 나는 극도의 강박증과 해방감을 동시에 배웠고 매혹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일상 속에서 이와 같은 궁극의 스타일을 완성시킬 수 있는 영역은 잠자리에 있음을, “작은 죽음”(La petite mort)이라는 말을 통해 배웠다. 사랑의 충동과 죽음의 본능, 얼핏 보면 대치되는 두 본능의 극적 만남을 일컫는 이 표현은, 섹스의 끝, 절정에 도달한 직후에 찾아오는 암전,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이 휩쓸고 간 뒤 찾아오는 경계를 알 수 없는 추락을 가리킨다. 그 아득함이 주는 것이 공포가 아닌 평온함이라는 사실을, 맨 처음 오르가슴에서 느끼고 나는 얼마나 당황했던가.
자의식의 과잉과 감각의 과잉
뜨겁고 습기 찬 한국의 여름에도 과잉의 미덕이 있다.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매혹적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감각의 한계치를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기후의 직접성 때문이다. 며칠 전 어느 술자리에서 누군가 내게 물었다. 날씨 좋은 캘리포니아를 떠나 무더운 여름철마다 한국을 찾는 이유를. 나는 대답했다.
-저는 한국의 여름이 좋은데요. 무덥고 끈적거리잖아요. 낮보다는 밤이 좀 더 매력적이기는 하지만요.
밤이 찾아오는 도시의 한풀 꺾인 열기는 여전히 습기로 촘촘하다. 얇은 땀이 베일처럼 맨살로 드러난 팔과 다리를 감싼다. 땀구멍들이 일제히, 그러나 각기 다른 포즈로 조금 더 열려버린 기분이 든다. 감각이 열린다. 구멍이란 신기한 것이라서 좀더 열릴수록 좀더 깊이 빨아들일 것만 같다. 여름밤과 몸이 소통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이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한다. 각본은 없다. 날씨의 변화처럼 언제일지 알 수 없으나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때로는 폭풍 전야의 불길함처럼 잔뜩 긴장하게 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폭우가 쏟아지기 직전의 하늘을, 그리고 터질 듯 습기를 머금은 대기를 떠올려 보라. 어디선가 남녀가 혹은 남남이 혹은 여여가 눈 맞아 일을 벌일 것 같은 날씨가 아닌가.
우정, 잠자리, 지적 교류 나눌세 명의 남자가 필요한지도 몰라
세 남자는 한 남자가 되기도 하고
분열 거듭하다 사라지기도 하지 성적 몽상과 연결된 날씨 취향
한여름 떠올리면 남자의 취향에
대한 상념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런 이와 여름 보낼 수 있다면… 날씨의 취향이 나의 성적 몽상과 연결되어 있다 보니 한여름을 떠올리면 남자의 취향에 관한 상념으로 이어지고는 한다. 성숙한 몸과 마음을 지닌, 섹스를 잘하는 남자. 성정의 건조함을 유지하되 끈적이는 섹스를 할 줄 아는 남자와 여름을 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상상한다. 잠자리는 숱한 실망과 욕구의 어긋남이 오가는 자리이다. 자잘한 실망을 딛고서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배려와 소통에 있다. 그리고 지적인 자기성찰능력 없이 배려와 소통은 쉽지 않다. 자의식의 과잉은 자주 사람의 눈을 흐려 자신과 상대방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반면 감각의 과잉은, 관계 속 둘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그 안에서 함께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어디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가를 실험해 보는 것과 같다. 다만, 감각의 과잉에 이르기 위해서는 건조하리만큼 명징한 상황 인식과 이성적 판단이 필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절제 없이는 과잉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절박함에 압도되는 순간, 침실은 주어진 답을 내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시험장이 되고 만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상실과 도달해야 할 목표에 휩쓸리는 순간, 행위는 지루한 서사의 답답한 틀 안에 갇히고 만다. 언젠가 다른 여성들과 함께 남자의 취향을 나누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어쩌면 여러 명의 남자가 필요한지도 모른다고. 우정을 나눌 남자, 잠자리를 함께할 남자, 지적 교류를 나눌 수 있는 남자.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한다면, 이 모든 말 앞에 “안정적으로”라는 수식어가 들어가야 한다. 특히 일시적 잠자리를 나눌 남자를 찾아 헤매는 것은 여러모로 낭비라고 생각하므로. 무엇보다도 “비용”의 낭비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요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남자를 기다리기에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으니 그 가능성을 분리하는 편이 실용적이라는 이야기를 농담 삼아 덧붙였다. -우리는 종종 바라는 것을 한꺼번에 뭉뚱그려 생각하려고 하는데, 때로 건조하게 바라보면 그것만으로도 홀가분해져. 세 남자가 주변에 있지 않더라도, 세 남자 중 한 남자만 가까이 있는 현실에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잖아? 한 남자에게 세 가지를 모두 원하지 않고서 말이야. 아무도 없다손 치더라도 셋 중 한 남자는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춘 남자를 만날 희망보다는 더 실현 가능성도 있고 말이야. 이것은 사계절을 모두 각기 그 모습대로 사랑하고 기다리는 자의 마음과 비슷하다. 대한민국의 사계절은 이렇게, 나를 균형있게 키운 셈이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한 남자를 생각했다. 나의 양손잡이 남자를. 양손을 모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사용할 줄 알았던 한 남자를. 20대의 중반을 달려가던 시절, 나는 그 누구의 여자로도 살고 싶지 않았다. 내 삶에 오롯이 내가 있고 지나치는 길목에서 남자들을 만났다.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파리에 도착했던 나는, 지하철을 수차례 갈아타며, 엘리베이터 없는 6층 건물을 이민 가방을 들고 기어가듯 올라갔다. 나를 도와주던 고마운 여자친구들이 있었고 우리들은 함께 노동하며 서로의 삶을 함께 짊어지고 나아갔다. 나의 팔과 다리는 날로 튼튼해져 갔지만, 내가 그 삶에서 배운 것은 짐을 적게 만드는 일이었다. 덜 가지고 덜 원하되 내 삶을 더 누리는 일. 내가 가벼워지자 나를 누르지 않았고 내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타인에게 절실히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한때 나의 연인이었고 오랜 친구가 된 양손잡이 남자와 나는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잠자리를 나누는 사이에서 잠자리는 함께하지 않지만 우정을 나누고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 관계로 변화를 거듭했다. 그는 동시에 세 남자일 때도 있었고 두 남자 혹은 단지 한 남자일 때도 있었다. 수년이 흐른 뒤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왜 남들처럼 사랑하지 않았을까. 그가 대답했다. -인생에서는 너무도 가벼워져서 부유하듯 떠돌 수밖에 없는 시기가 있는 듯해. 우리는 운 좋게 그 시기를 함께 살았어. 대기를 떠도는 투명한 거품처럼. 때로 실연은 황홀한 자기긍정의 계기 만났다 흩어지고 투명하게 사라지는 흔적들. 내 젊음을 떠올릴 때면 그려지는 풍경이다. 그것은 내가 받아들이는 여름의 느낌과 비슷하다. 아름다움은 시각적이기만 하지는 않다. 가벼이 터지는 감각 혹은 쥐었던 것을 잃은 뒤 더욱 간명해진 나를 발견하는 기쁨에도 있다. 때때로 실연은, 연인의 떠나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황홀한 자기긍정을 맞이하는 계기가 된다. 세상의 전부와도 같았던 관계가 마감되었을 때에도 마침내 살아남고 더 성숙해진 나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 세 남자는 한 남자가 되기도 하고 혹은 무수히 부서지고 분열을 거듭하다 사라지기도 한다. 어쨌든 나는 그 남자들의 존재와 부재를 거치되 그 누구의 여자도 되지 않는다. 완벽한 짝을 통해 온전해질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올바른 상대를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구원해주리라는 오래된 서사에의 믿음을 버리고, 나는 이미 나로서 모자람이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일 때, 남성/여성을 바라보는 취향은 즐거워진다. 선택이 우리를 완성시켜주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너무 자주 감정적 과잉에 취한 채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놓쳐버린다는 것, 삶은 생각만큼 절박한 선택의 연속이 아니라는 것. 언제나 배타적 선택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 지나가는 계절처럼 누리되 취향을 가미할 뿐이라는 것. 취향을 누릴 수 있는 힘은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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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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