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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
(21) 잘 헤어지는 법(마지막회)
변심을 털어놓은 당신…용기를 내줘서 고마워
유혹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이별의 이야기다.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고 말했던 남자가 있었다. 나는 그의 변심을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했고, 그로 인해 내가 포기한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리며 그를 원망했다. 매달리기도 했고 그의 잔인함에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에게 차라리 감사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내 곁에 남아 있지 않아줘서 고맙다고. 명확히 이별을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먼저 내주어서, 우리의 관계에 이별의 존엄을 지킬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침대 밑에서 내 것이 아닌 마스카라통을 발견해서 헤어진 남자도 있다. 당장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화도 났지만, 결국에는 이미 끝난 관계를 마무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명확히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 놀랍게도 그가 밉지 않았다. 이미 끝난 관계를 미련으로 묶어 어영부영 머물러 있었음을 내가 먼저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남자들은 지금까지 내가 지난 ‘유혹의 학교’ 칼럼에서 언급한, 나의 멋진 연인들이기도 하다.
실연의 트라우마를 성찰의 계기로
연애를 잘하는 법이 무엇이냐고 간혹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일반론적인 대답을 내놓기는 힘들겠지만, 몇 가지 꼽을 수 있는 것은 있다. 불편한 소통을 잘할 줄 아는 것과 잘 헤어질 줄 아는 것이다. 쉽고 편안한 소통은 어렵지 않다. 나와 생각과 삶의 방식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행운은 매번 찾아오지 않는다. 동류의 사람들 속에서도 언급하기 불편한 부분이 있고 그것에 침묵하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투사적 동일시에 의존하여 장래의 파트너에게 매혹되는 낭만적 사랑을 넘어 합류적 사랑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두 사람의 정체성이 다름을 인정한 위에서 사랑의 유대를 공유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협상해 가는 사랑이다. 합류적 사랑은 특별한 사람의 발견보다는 특별한 관계의 중요성을 더 부각한다. ‘그 이상의 통지가 있을 때까지’ 관계를 지탱해주는 것은 관계를 지속할 만큼 혜택을 누린다는 쌍방 당사자의 인정을 바탕으로 한다. 바꿔 말하면, 관계 지속에서 누릴 수 있는 가치에 관한 당사자 모두의 인정이 없다면 적절한 방식의 매듭짓기가 필요하다.
이별을 마주하는 일은 관계를 시작하는 일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것은 가장 불편한 소통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잘 헤어지는 사람은 잘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희망차다. 누군가는 헤어진 다음 서로에게 담담할 수 있음은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제대로 사랑한다는 것이 헤어질 때 고통의 한계치를 경험하고 더 이상 돌아보고 싶지 않을 만큼 상처를 남기는 것이라면, 우리는 상처투성이 패잔병처럼 여생을 살아야만 하는가. 실제로 실연의 트라우마는 전쟁의 상처만큼 강렬할 수 있다는 심리학적 보고도 있다. 그러나 연인관계는 억지로 호송되어 전쟁터로 투입되어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정과는 다른 서사를 쓸 수 있다. 마땅히 애도(mourning)의 단계는 필요하다. 놓아주는 것(letting go) 역시 이루어져야 한다. 놓아주는 것과 함께 애도가 이루어질 때 의외로 평온한 비탄을 맞이하기도 한다. 슬픔이 반드시 존재를 무너뜨릴 만큼의 고통이 될 필요는 없다. 둘만의 관계에 함몰되어, 잊었던 자신을 되살펴보는 성찰의 계기가 되기도 하고 한 발자국 성장할 수 있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연애 잘하는 법에 관한 질문에일반론적 답 내기 힘들겠지만
불편한 소통을 잘하는 것과
잘 헤어질 줄 아는 게 아닐까 협상과 재협상으로서의 유혹
세상과 사람들을 관통하여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당신만의 서사를 기대해본다 수많은 연애 관련 서적은 자기계발서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사랑과 유혹에 관한 깔끔한 방법론과 소통법을 제시한다. 남자들은 여자와의 적절한 대화법을 권유받는다. 여자들은 동굴이 필요한 수컷을 이해하라는 조언을 얻는다. 이제는 연애담론의 고전이 되어버린,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처럼, 남성과 여성은 서로에게 외계인인 존재라는 설정은 이성관계를 이해하는 기본처럼 통용된다. 남성과 여성은 애초에 다르게 태어났고 성적 차이에 따른 고정관념을 인정하는 편이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편리하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 불편한 소통의 문제에 직면하기보다는 애초에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빠르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라고 속삭이는 조언에서, 다름의 인정은 타자에 대한 존중이라기보다는 때이른 포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아가 사랑에 고통받는 이들의 문제는 너무 다르게 태어난 두 성별 간 소통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 속에서 기존 사회제도와 역사를 통해 떠안게 된 제반 문제는 개인의 영역으로 치환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신혼 첫날밤에야 처음 얼굴을 마주하고 대가족의 틀과 각종 관습, 전통에 지배받았던 그와 그녀들도 우리와 같은 문제로 고통받았을까? 옛날 옛적 농경사회에서도 지금처럼 사랑과 연애에 관한 담론이 범람했을까? 자본주의와 핵가족제도 속의 근대화된 자아는 기존에 전통과 관습에 의해 결정되었던 많은 것을 개인의 선택으로 결정해야 할 책임에 당면한다. 자신이 가진 것, 일련의 선택들이 자아를 규정한다. 나는 내 선택의 총합이고 선택의 책임은 내 몫이 된다. 선택할 것이 너무 많아 피로한 인생이다. 연애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선택받을 만한 사람일까? 저 사람은 내 선택에 마땅한 존재일까? 잠자리는 언제쯤 갖는 것이 좋을까? 좀더 진지한 사이로 발전시켜야 할까? 헤어지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물어볼 대상은 보이지 않는다. 자기계발서류의 연애서적이 시장성을 갖는 이유이다. 가정과 학교의 틀 안에서 별 탈 없이 잘 자란 아이들에게 연애의 시간은 비로소 어른의 과제에 직면하는 시간이 된다. 부모나 선생에게 묻고 답을 구하기에는 은밀하다고 여겨지는 각자의 공간, 나아가 선택해야 할 것들로 가득 찬 영역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가 연애와 함께 성장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오히려 연애와 친밀성의 공간을, 아이의 시간을 연장 혹은 확장시킬 수 있는 자리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두 아이가 만나 함께 성장하지 못하는 연애는, 상대방에게 일방적 구원을 구걸하는 관계로 맴돌 위험이 크다. 대체로 관계의 파탄과 자기파멸 혹은 상대 역시 무너뜨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뜨겁고 열렬하고 치명적이어서 이후에 회복이 힘든 사랑의 실체는 아닌가? 소통은 ‘반응’이 아니라 ‘응답’이다 우리는 어쩌면 질문을 바꿔야 하는지도 모른다. 선택의 특별함을 묻는 것에서 실천의 특별함을 묻는 것으로.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구원할 수 있는 특별한 상대를 선택했는가 질문하는 대신, 다른 두 개인이 만나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를 통해 성장하고 있는가 되물어야 한다. 자기성찰은 물론 관계의 성찰을 향한 질문이 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앤서니 기든스는 친밀성은 타자에게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특성을 아는 것 그리고 자기의 특성을 활용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며, 타자에 대한 개방은 역설적으로 개인적 경계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의 의사소통 현상이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개인적 전통과 역사를 가진 인간을 대할 때 적절한 방법론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 다른 타자의 경계를 민감하게 인지하고 마침내 합류의 지점을 찾아내는 감수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대화의 끝마다 “진짜?” “정말?” 등으로 반응하고 상대의 끝말을 반복해주는 간편한 대화법으로 멈춰서는 안 된다. 소통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반응의 연속이 아니라 응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응답은, 나와 당신으로 이루어진 공간만을 향한 것일 수는 없다. 개인생활의 영역은 사회와 제도 변화에 의해 재질서화되며 그 역으로 친밀성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는 사회를 뒤바꾸는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유혹의 학교는, 바로 그 친밀함의 내밀한 서사를 사회적 관계의 맥락 속에서 풀어놓고 싶은 희망에서 시작했다. 협상과 재협상의 행위로서의 유혹, 정복이 아닌 공통의 영토를 개편하는 유혹, 혹은 불편한 소통을 즐겁게 이어가는 노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쉽지만, 유혹의 학교는 잠시 문을 닫는다. 헤어짐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불편한 소통의 시도이다. 단순한 반응이 아닌, 응답을 꿈꿔 본다. 당신만의 유혹의 서사를 기대한다. 세상과 사람들을 관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끊임없는 협상과 성찰에 대한 멋진 고백을. 쉽고 편한 소통만을 찾아 도피하는 것이 아닌, 불편하더라도 말하고 응답하고 소통하며 함께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을 말이다. 이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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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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