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6.14 19:33
수정 : 2006.06.14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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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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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칼럼
광화문 진출을 염원하던 시절이 있었다. 학교 문을 벗어나기도 힘든 시절이었으니 몽상 같긴 했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꿈은 더욱 간절했다.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골방에서 이불 뒤집어쓴 채 나눠야 했던 아주 불온한 꿈이었다. 도대체 우리 역사속에 광화문을 점령했던 적이라도 있었던 걸까 의심도 들었지만, 꿈의 근거는 역사 속에 선명했다.
광복은 광화문 앞으로 밀려든 인파로 실감할 수 있었고, 독재 타도의 함성이 광화문을 휩쓸면서 4·19 혁명은 이뤄졌다. 하다못해 5·16 쿠테타의 주인공들도 광화문 언저리 서울시청 앞에서 이른바 쿠테타 공약을 발표했고, 12·12 군사반란의 주역들은 맨 먼저 광화문 앞에 탱크 두 대를 배치했다. 굴욕적인 한-일 협정 반대시위가 시청 앞까지 진출할 때 세상은 변하는 줄 알았다.
당시 신화가 되어버린 역사였지만, 광화문 진출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광화문을 장악하라, 세상은 바뀐다! 그래서 짭새나 백골부대가 학교를 점거하고 있어 시위가 단 1분도 버티지 못하고 진압되던 상황에서도 광화문 진출 모의는 계속됐다. 교문을 사이에 둔 공방전으로 발전했을 때, 궁극적인 목표는 광화문 점령이었다.
유신체제 아래서 광화문에 작은 파열음이 일어난 것은 1978년의 일이다. 시내버스 환기통 위에 올려진 불온삐라가 거리에 날리고, 일군의 학생들은 광화문 뒷골목을 도깨비처럼 돌아다니며 기습적으로 시위를 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이듬해 부산과 마산의 심장부가 시위대에 점거됐을 때도 광화문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했다. 80년 서울의 봄 때도 전선은 서울역에서 멈춰섰다. 시청까지도 진출하지 못했다.
4·19 혁명 뒤 시민이 광화문 네거리까지 진출한 건 6월 항쟁 때였다. 그러나 그 거대한 힘으로도 네거리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지금의 청계천 초입까지 진출한 게 고작이었다. 그 탓이었을까. 6월 항쟁은 민주 세력과 독재체제의 적자가 공존하며 경쟁하는 기이한 체제를 탄생시켰다.
이후 광화문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평화적으로’ 점령된다. 광장을 점령한 이들은 미군 탱크에 압사당한 미선·효순양 추모 광화문 촛불집회를 주도하며, 처음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국민으로 하여금 성찰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2004년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광화문을 다시 점령해 기득권층의 거대한 역류를 온몸으로 막았다.
엊그제부터 다시 광화문이 점령되고 있다. 붉은 도깨비들은 4년 전의 열정과 함성으로 월드컵 본선 1차전부터 서울 심장부를 덮어버렸다. 물론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 정치와 자본이 멍석을 깔아놓고, 미디어가 사회를 자처한다. 자본의 장삿속과 정치의 잔꾀, 미디어의 선동은 자유와 소통, 관용과 공동체를 추구하는 광장의 정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멍석 위에서 재주 부리는 곰이 떠오르는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기우이길 바란다. 광장이 장삿속과 잔꾀와 선동에 놀아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바람처럼 걸림 없는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어찌 그 낡은 그물에 가둬둘 수 있을까.
다시 광화문을 점령한 이들로 하여, 우리는 소망한다. 광장의 시대를 열어젖힌 건 6월 항쟁이었다. 항쟁은 민주화를 깃발로 87년 체제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그건 과도 체제였다. 대통령 직선, 5년 단임제는 그 상징이다. 독재 종식은 담보할지 몰라도 비효율과 무능을 제도화했다. 6월 광장의 세대에게 주어진 소임은 여기서 나온다. 미완의 87년 체제 극복으로 광장의 변혁사를 매듭짓자.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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