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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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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칼럼
개똥도 약에 쓰인다는 말은 개똥을 낮춰보는 게 아니다. 개똥을 끌어다 세상엔 쓸모없는 것이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할 뿐이다. 기독교는 이런 쓸모를 ‘신의 계획’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만물엔 일정한 신의 계획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티끌 속에도 우주가 있다는 불가의 안목과 상통한다. 개똥이 아니라 생명에 이르면 강조 수준은 달라진다. 그러나 현실에서 개똥은 개똥일 뿐이다. 이 말은 그저 위로하고 동정하는 데 쓰인다. 슬퍼하지 마라, 비록 실패했지만 신은 귀히 쓰시려 세상에 너를 내셨다, 초라해 보이나 신이 보기엔 아름답다. 설교나 법문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나 소·돼지부터 사람에까지 등급 매기는 시절, 이 말의 공허함은 더욱 커진다. 특히 사회로 막 진출하려는 아이들에게 1~9등급 낙인을 찍는 수능시험의 현장에선 더욱 그렇다. 사람 등급이란 게 소·돼지, 쌀과 콩 따위에 매겨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좋은 등급 받으면 값이 높아진다. 다른 게 있다면 등급에 따른 몸값의 격차는 소·돼지와는 비교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등급을 매기더라도 신은 자신의 계획을 그와 별도로 실현한다고 하겠지만, 세상은 신의 계획조차 등급으로 현실화된다고 믿는다. 엊그제 58만9000여 수험생들이 수능시험을 치렀다. 지금쯤 대충 제 등급을 눈치챘을 것이다. 환호성은 극소수고, 한숨은 가을 높다란 하늘에 넘쳐난다. 부모 몰래 눈물짓거나, 뒹구는 낙엽처럼 거리를 배회하거나 때론 베란다 차가운 철제 가로막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행복은 성적 차례가 아니다, 최선을 다한 너희는 아름답다 따위의 위로가 이들의 아픔을 다독일 순 없다. 행복이 성적순은 아니지만, 세속적 성공은 성적순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을 이들은 잘 안다. 차라리 등급에 순응하라는 차가운 충고가 더 현실적일지 모르겠다. 물론 평가의 필요성을 부정할 순 없다. 한정된 인원을 뽑는데,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은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평가시험이 아이들의 학업성취 의욕을 자극해 실력향상에 이바지한다고 주장해선 안 된다. 그 실력을 아이의 모든 능력인 양 주장해서도 안 된다. 더 어려운 수능과 본고사를 주장하는 이들이 더러 그렇게 주장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가 주관하는 2003년 국가학업성취도 평가(PISA)에서 우리 중3생은 문제해결 능력 1위, 읽기 2위, 수학 3위, 과학 4위를 기록했다. 학업성취국제연합협회가 주관하는 평가(TIMMS)에서도 수학 2위, 과학 3위에 올랐다. 평준화 상태에서 우리 중3생의 학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면 고교 3년 동안 밤낮없이 수능을 준비해 온 학생들은 어느 수준일까. 성균관대 양정호 교수팀의 연구 결과, 경제학·수학·컴퓨터공학과 신입생 757명을 대상으로 수학 시험을 치른 결과 초등생 수준의 분수나 백분율 문제를 틀린 학생이 15%, 24%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교 3년이 초등생만도 못한 학생으로 만들어 버렸다. 왜 그런 걸까. 학교 수업시간, 학생 3분의 1은 이미 알고 있다고, 3분의 1은 이해할 수 없어서 엎드려 잠을 잔다. 나머지는 수업에 집중하려 해도 집중할 수 없다. 학교는 수능시험으로 학생들을 몰아가고, 학생은 소중한 3년을 그렇게 허비한다. 아이들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규격화된 지식 또한 늘리지 못하며, 등급 낙인이나 찍는 수능시험은 바뀌어야 한다. 그저 졸업자격시험 정도면 된다. 90% 학생을 방황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방법은 있다. 대학이 바뀌어, 고교의 학생평가권과 대학의 선발권이 함께 존중받으면 된다.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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