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2.26 17:18
수정 : 2006.12.26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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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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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칼럼
“뭐, 이런 게 다 있어. 노인들이 이걸 어떻게 외우라고. 늙은 시부모가 찾아오지 못하도록 그렇게 이름 지은 것 아냐? 그래 황금성이라고 하면 어디가 덧나나?” 국어정책 세미나였으니 망정이지 다른 자리에서 그런 푸념을 했다면 눈총받기 안성맞춤이다. 어디 그런 아파트가 한두 군데인가. 그를 골탕 먹인 아파트는 롯데캐슬골드였다.
고급스런 외국어는 요즘 아파트 상표에 다 모여 있다. ‘엑스트라 인텔리전트’를 합성한 자이, 타워(탑·최고)와 팰리스(궁전)를 합친 타워팰리스는 진부하다. 루미아트, 위브, 아너스빌, 센트레빌, 데시앙, 휴먼시아 등 열이면 아홉이 이 모양이다. 홈타운이 ‘촌스러웠던’ 현대건설은 힐스테이트로 바꿨다. 주상복합은 더 심하다. 갤러리아팰리스, 트라팰리스, 에클라트, 메가트리움, 위브포세이돈, 위브센티움, 하이페리온, 트럼프월드, 리첸시아, 아데나루체, 아크로리버, 쉐르빌, 아크로비스타, 미켈란쉐르빌, 리더스뷰 …. 뭘 뜻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럭셔리’하고 ‘글로리어스’하며 ‘부티’ 나 보인다.
현대건설은 힐스테이트를 택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언덕, 고급’이라는 뜻을 가진 힐, ‘지위, 품격’을 뜻하는 스테이트를 합성해, 고품격 혹은 높은 지위를 뜻하도록 했다. 아파트의 질이 좋아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긴 굳이 왜 그런 설명을 할까. 롯데건설의 옛 상표인 낙천대 주민들은 명칭을 롯데캐슬로 바꾸려다 행정관청과 한바탕 싸웠다. 이름만 바꿔도 값이 오른다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까.
말은 현실을 반영하는 도구다. 대상의 동작·속성·감정 따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탄생했다. 그런데 지금 말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단언하듯이 결코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 그저 이야기나 환상을 추구한다. 아파트 상표는 그 상징이다. 굳이 외국어를 쓰는 이유는 환상을 더 자극하고자 함이다. 궁전과 팰리스, 황금성과 캐슬골드, 어느쪽이 더 환상적인가? 환상 자극 효과는 허영심이 큰 사회일수록 더 커진다.
상품 시장에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건 아니다. 그 위력은 정치 시장에서 더 잘 발휘된다. 자신의 존재기반인 현실로부터 동떨어져 사고하고 행동하는 허위의식이 강한 사회일수록 그런 말의 영향력도 커진다. 지난 한 해를 대표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세금폭탄’이었다. 단 1%에게도 적용되지 않는 이 말은 수많은 국민을 들끓게 했고 부동산 정책의 신뢰를 깨버렸다. 1%도 안 되는 이들은 뒤에서 이를 즐겼다. ‘뉴라이트’도 그렇다. 지향과 비전도 없는 상태에서 일부 언론과 정치권의 환호 속에 뉴라이트 집단은 등장했다. 스스로 드러낸 이들의 속성은 친일, 친쿠데타, 독재, 반시장주의였다. ‘수구꼴통’과 같았지만, 뉴라이트는 하나의 실체가 되었다. 전체주의 신봉자들이 자유민주주의의 기수가 된 것도 말의 마술 가운데 하나다. 이들이 한 일이라곤 진보세력을 반시장, 반자유민주주의로 내몬 것뿐인데, 이들은 자유민주주의가 되었다. ‘친북 좌파’도 그렇다. 절대적 가부장 사회인 북한을 흠모한다면 좌파보다는 우파가 어울리는데, 우리 사회의 좌파와 진보세력은 싸그리 친북으로 매도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좌파 신자유주의는 그 극치였다. 그는 요즘 정치적으로 다른 노선을 ‘지역주의’로 내모는 데 여념이 없다. 이제 배반의 상징은 훈남(훈훈한 남자)을 자처하고, 동생과 의절했던 이는 국민 누나를 자처하고 있다.
그렇게 올 한 해가 저문다. 희랍에서 말(로고스)은 이성을 뜻했다. 허위의식을 깨고 거짓과 진실을 가리는 도구였다. 소외된 이들에겐 세상을 바꾸는 유일한 무기였다. 부질없는 꿈이라도 좋다. 내년엔 말이 진실성을 회복하기를 간구한다.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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