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란 소설 <2회>
오후에 고교 동창 남자애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가 거절당했다. 명절이라 바쁜 모양이었다. 나는 라면을 끓여 먹고서 저녁에 엄마와 함께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집 바로 앞에 있는 고등학교 운동장엘 갔는데 아직 울창한 나무들에 가려 생각보다 어두웠다. 학교 건물 꼭대기 중앙에는 맞은편 아파트에서도 보일 만큼 커다란 전자시계가 있었는데 빛이 빨간색이어서 더 어두운 느낌이었다. 그 학교는 내가 나온 고등학교는 아니었는데 10년을 그 앞에서 살다 보니 가끔은 그 학교를 졸업한 것 같기도 했다. 심지어 봄에도 그 학교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더라면, 하고 대입을 해보기도 했던 것이다.
한 바퀴를 돌고 힘이 들어 시계를 보면 2분이 지나 있었다. 작은 학교여서 운동장도 작았고 빠른 걸음도 아니었는데 그랬다. 강아지는 토이 푸들이라 몸길이가 4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몸으로 운동장 끝에서 끝까지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갈색이라서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디 있나, 하고 둘러보면 갑자기 저 끝에서 땅강아지 같은 게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었다. 나보다 낫군. 나는 생각했다.
엄마와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나는 어떤 것들은 감춰가면서 말했고 어떤 것들은 과장해서 말했다. 바지가 꽉 껴서 오래 걷지 못하고 금세 집으로 돌아왔다.
난 더 걸을 수 있는데.
엄마가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엄마보다 늙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책을 보다가, 텔레비전을 보다가, 강아지랑 많이 놀았다.
이리 와봐.
언니가 베란다에 서서 말했다.
달. 달 좀 봐.
엄마와 내가 베란다로 나갔더니 강아지도 따라왔다.
진짜 꽉 찼다.
소원 빌자.
우리는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강아지는 내가 안았다.
나 작년이랑 소원 똑같아.
내가 말했다.
나도.
엄마랑 언니가 동시에 말했다. 나는 달을 오래 바라보다가 들어왔다. 추석 당일이어서 그런지 어디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괜찮았는데 어쩐지 엄마가 외로워 보였다. 사과나 배 같은 걸 사들고 잠깐 인사라도 하고 갈 남자 친구를 나는 만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가 아니라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각자 스마트폰을 들고서 새벽까지 쓸데없는 검색을 하다가 잠들었다.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 일어나자마자 그런 생각을 했다. 생각보다 너무 일찍 일어나고 만 것이다. 엄마가 마트에 또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살 것도 없었다. 구경만 하기는 싫었다. 강아지가 내가 일어난 것을 어떻게 알고 달려와서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좋은가?
엄마는 벌써 몇 가지 음식을 해놓은 상태였다.
잡채 했어?
망했어.
잡채를 먹어보고 정말 달다고 생각은 했는데 맛있다고 말했다. 달았는데 왠지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부추로 전을 부쳐서 막걸리와 먹었다.
아침부터?
내가 묻자,
언니가 요즘 매일 막걸리를 한 병씩 마신다.
엄마가 말했다. 어쩐지 가끔 집에 올 때마다 냉장고에 늘 막걸리가 있었는데 막걸리가 있는 게 아니라 막걸리가 채워져 있는 느낌이었다. 가끔 내가 저녁을 혼자 해 먹고서 엄마한테 잘 있느냐고 문자를 했을 때도 엄마는 자주 ‘언니랑 막걸리에 무엇무엇을 먹었다’는 답을 하곤 했었다. 밥이 잘 안 넘어가나 봐. 그런 날에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오전에 한 잔을 마시고 취해버렸는데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자기 집으로 와서 명절 음식에다 막걸리를 한잔하자는 것이었다. 류현진 야구 중계가 한다면서 그걸 보면서 먹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들떠 있기에 나는 그 경기가 끝나면 가겠다고 말했다. 나 아침부터 술을 조금 마셨거든, 하고 덧붙였다가 신여성이라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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