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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22 09:27 수정 : 2014.10.22 09:27

이주란 소설 <3화>



집에서 나왔는데 여름처럼 더웠다. 내려올 때 입고 온 긴 옷을 입어서 땀이 줄줄 흘렀다. 이른 추석이지만 어쩐지 추석이라서 선선할 것만 같아 긴 옷을 입고 온 것이다. 어딘지는 대충 알았지만 초행길이어서 나는 친구가 알려준 버스를 두 대나 놓치고 나서야 52번 마을버스를 탈 수 있었다. 약속 시간은 이미 40여 분이나 지나 있었다. 나는 106동 앞 슈퍼에서 소주 다섯 병과 막걸리 일곱 병을 샀다. 조금 민망했는데 슈퍼 손님들 대부분도 술을 사고 있었다. 나는 복분자주 세 병을 더 집었다가 돈이 모자라서 다시 내려놓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어. 버스를 잘 몰라서.

얼른 먹자.

응.

거실엔 이미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꽃 모양 자주색 나무 상에 동그랑땡과 생선전, 잡채, 막걸리 잔, 열무김치, 포도가 올라와 있었다.

주막에 온 것 같다.

내가 말하자,

이건 익은 거, 이건 안 익은 거.

친구가 말했다. 열무김치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여자들이 군 훈련을 받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막걸리를 마셨다. 친구네 엄마는 내가 오고서 볼일이 있다며 차 키를 들고 나가며 말했다.

편하게 놀아.

실제로 나는 소파에 기대 반쯤 드러누워 술을 마셨다. 치마를 입고 있어서 아주 널브러질 수는 없었는데 친구는 자꾸만 내게 말했다.

여기 기대. 누워.

원피스의 겨드랑이 부분이 꽉 껴서 소파에 기대 한쪽 팔을 올려놓는 것이 어려웠는데 내가 불편해하는 것으로 생각할까 봐 최대한 늘어진 포즈를 취했다.

아버지 왔다 가셨어?

몰라, 그 인간.

내게는 왔다 갈 아버지조차 없지만 친구의 마음을 심히 이해하는바, 나는 살짝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다섯 시간 넘게 술을 마셨다. 아침부터 기름진 음식들과 술을 마셔서 그런가, 나는 중간에 똥도 한 번 쌌고 한 시간가량 낮잠을 자기도 했다. 그사이 친구는 슈퍼에 가서 번데기와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청양고추를 썰어 넣고 번데기탕을 끓이기에,

고춧가루도 조금 넣으면 맛있는데.

하고 말했더니 싱크대며 선반을 한참 뒤지고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청양고추를 넣었더니 고춧가루 없이도 맛있네.

그니까.

우리는 번데기탕에다 막걸리를 마셨다. 일곱 병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만났던 남자들에 관한 이야길 조금 하고 각자 자신의 장단점을 분석하기도 했는데, 20년 넘게 알고 지내왔기 때문에 이견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간간이 자기 자신도 잊었던 에피소드가 튀어나와 박장대소를 하기도 했다.

벌써 서른이 넘었어.

무섭다.

우리는 웃으면서 무섭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말을 하다가 두 번인가 짧게 울기도 했다. 원래 잘 우는 편이어서 친구도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누구 부르고 싶다.

어차피 이따가 다 만날 건데 뭐.

나 일산 가서 남자 친구 좀 만나고 늦게 갈 거야.

어제 보고 뭘 또 봐.

그럴 때다. 넌 그동안 뭐 하고 있을 거야?

강아지랑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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