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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30 09:26 수정 : 2014.10.30 09:26

이주란 소설 <9화>



원래는 선미를 만나고 그다음 날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안 가려고?

안 가려고. 내일 가려고.

하루 더 있겠다는 말에 엄마가 좋아했다. 나는 아침을 먹고 강아지와 놀다가 베란다에 나가 오래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날이 더웠다. 모로 누워 집엔 언제 갈까 생각하는데 선미에게 연락이 왔다.

일 좀 할래?

일?

지금 가을 옷 때문에 정신이 없다.

알았어.

선미가 4년째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쇼핑몰은 젊은 남성 의류 쪽에서 꽤 유명했다. 추석 연휴에 들어온 주문이 밀려 일손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나는 밥도 먹지 않고 선미네 회사로 출발했다. 회사에 도착해서는 선미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작업반장이라는 아주머니와 함께 바로 일을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쉬지 않고 딸 자랑을 하면서도 프로답게 빠른 속도로 오전 작업을 마쳤다.

점심을 먹고 들어오면서 1,200원짜리 펜을 두 개 사왔는데 두 개 중에 하나가 나오질 않았다. 분명 써보고 산 건데. 나는 다섯 시간을 더 일하고 퇴근해서 다시 문구점에 갔다.

낮에 샀는데 펜이 안 나와요.

주인아저씨는 신문을 쥔 손으로 카운터를 두어 번 탁탁 치더니 펜 구역을 가리켰다. 거기엔 펜이나 지류는 교환이 안 된다고 쓰여 있었다.

이건 불량품이잖아요.

아저씨 말로는 펜이란 것은 원래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써보고 사라고 하는 것이며 펜이나 지류는 교환이나 환불이 안 되는 것이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문구점도 그런 손해를 감수하고 펜을 들여오는 것이라고, 아저씨는 무테안경을 추어올리며 내게 말했다.

아가씨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뭣도 모르면서 우겨대는 거야.

아저씨는 희끗희끗하지만 머리숱이 많았는데 그건 내가 평소 바라던 스타일이었다. 늙어서 내 남편이 저러면 좋겠다 싶은 헤어스타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아저씨는 계속해서 나를 쏘아붙였다. 나는 법 이야기가 나왔을 때 말문이 막혔지만 대부분 지지 않고 큰소릴 쳤다. 1,200원짜리 새 펜은 내 손에 쥐여 있었다.

아가씨 가져. 그리고 아빠 나이인 사람한테 그렇게 그러면 나중에 후회할 거예요.

나는 그렇게 그러면, 이라는 모호한 표현과 반말과 존대를 섞은 어법에 화가 났다. 화가 났지만 나는 밖으로 나왔다. 더 있다간 정말 싸우자는 것밖에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횡단보도를 건너 중앙차로에 서서 그 문구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 그곳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너무 불친절하신 것 같아요. 그거는 알아두세요.

내가 펜을 카운터에 내려놓자 아저씨가 내 손을 잡고 펜을 쥐여주었다.

가세요.

새벽까지 울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찍 깼다. 나는 9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문구점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가양점의 불친절함과 그…… 서비스 정신에 대해 지적 및 충고를 하려고 하다가 그만 울고 말았다. 상담원은 내게 ‘고객님 마음을 이해한다’면서 ‘울지 마시라’고 말한 뒤 대신 사과했다. 상담원은 내가 오래 운 뒤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대신 사과를 받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지금 뭘 한 거지? 도대체 나는 뭘 원하는 거지…….

우느라고 번진 화장을 고치고 선미네 회사로 갔다. 선미는 매일 내가 퇴근할 때마다 봉투를 쥐여주었다.

마지막 날 한꺼번에 줘도 되는데.

정당한 돈인데도 어쩐지 조금 민망했는데 선미 입장에서는 그게 좋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누구랑 또 싸웠냐?

엄마가 물었다. 선미네 회사에 나간 닷새 동안은 집에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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