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란 소설 <10화>
주말에 나는 일찍 일어나 식탁 위에 5만원을 올려두고 가족들이 깨기 전에 집에서 나왔다. 또 일찍 일어나버린 것이다. 변두리 자취방으로 돌아와서는 친구가 부탁한 독후감을 대신 썼다. 추석 때 우연히 잠깐 보았던 그 세 명의 고교 동창 중 한 명에게 부탁을 받은 것이다. 그 셋은 모두 군인 아버지를 두고 있었는데 그 친구만 아버질 따라 군인이 되기로 해서 간부 교육을 받는 중이라고 들었다.
너 책도 많이 읽고 잘 쓰잖아.
나 책도 잘 안 읽고 못 써.
나보단 나을 거 아냐.
그건 그렇겠지.
그날 낮부터 술을 함께 마신 친구로부터 내가 책을 많이 읽고 한다고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정해진 책 중에서 한 권의 책을 읽고 쓴 독후감을 제출하면 3점의 가산점을 받는다고 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애에게 받은 책은 총 세 권이었는데, 그중 《부대관리 Know-How 123》이라는 책을 골랐다. 그는 친히 책을 주러 우리 집까지 왔다. 그래, 네게 3점을 줄 수만 있다면 니가 우리 집에 온 게 처음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건 아니지. 만약 내게 군인 아버지가 있었다면, 나는 아버지의 독후감마저 써줬을지 모르지.
나는 종일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 뒤, ‘3점이 아니라 30점짜리다’라고 생각했으나 되돌릴 수는 없었다. 거기서 나는 이런 문구를 보았다. ‘대대장님을 생각하면 죽을 수 없다.’ 나는 월요일 오전에 A4 용지로 출력한 독후감을 편지로 가장해 보내면서 작은 메모를 함께 남겼다.
3점은 국가가 아니라 내가 주는 거란 걸 잊지 말길 바라면서
진심으로 네가 건강하길 기도할게.
진심이었다. 우리 중 몇 명은 S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축제에 간 동기들 중 누군가는 꼭 어둡고 시끄러운 과 주점들 사이에서 S를 보았다는 얘기. S는 가만히 한자리에 오래 서 있기도 했고 사람들 사이사이를 빠르게 지나치기도 했다고 한다.
무섭다.
우리는 그런 말을 들으면 꼭 무섭다고 말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 우리 중 누구도 이제는 축제 같은 델 가지 않는다. 소풍날처럼 축제 때는 늘 비가 오곤 했었고 그래서 더 무서웠다고 동기들은 말했다.
니가 더 무서웠어. 그날도 개 됐더라.
우리는 그렇게 농담을 하며 웃었지만 나는 흔들리는 S의 모습 앞에 펼쳐진, 술에 취한 채 웃고 있는 우리의 얼굴들이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나는 5년 전에 이미 S보다 더 산 사람이 되었다. 누나 같은 게 된 걸까. 가끔 잠이 오지 않는 어느 새벽에 S의 목소리나 어투, 그가 읽던 책 제목 같은 것이 떠오른다. 그의 주량이나 늘 신던 신발은 뭐였더라, 하다가 몇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많은 자리에서 함께했을 텐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S가 성격상 말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말을 안 한 거라는 것도 지금은 알 것 같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가 늘 쓰고 다니던 무테안경 너머의 눈빛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새벽에 든 생각이라서 물론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아마도 그게 맞을 것 같다. 그가 겪지 않은 시간을 지금 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괴기스럽다. 아주 오래 살 것 같았던 사람 대신 내가 살아 있다는 것. 또 내가 그때를 옛날이라고 말하는 것……. 무섭다. 무섭지만 가끔은 S가 부럽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그런 게 있어야 했다. 나는 그 책에서 본 ‘단 한 사람이라도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단’이라는 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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