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the) 친절한 기자들]
형사소송법 구속 사유는 ‘주거 부정·증거인멸 우려·도주 우려’
개정된 형사소송법에 구속 고려 요소로 범죄 중대성·재범 위험성 등 포함
‘사안의 중대성’ 강조함으로 검찰·여론 납득시키려는 의도로 볼 수도
무죄추정원칙과 충돌우려…뜻 모호한 탓에 수사기관 남용·악용 가능성도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공보판사는 기자들에게 구속 이유를 설명합니다. “소명되는 범죄 혐의가 중대하고 재범의 위험성 등에 비춰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이 인정된다.” ‘범죄 혐의가 중대하다’는 대목이 눈에 띕니다. 기사를 본 사람들은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혐의가 중대해 구속의 필요성이 인정된다?’, ‘혐의의 중대함을 판단하는 기준은 뭐지?’
지난 14일 서울중앙지법 윤강열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이른바 ‘종북 콘서트’를 기획하고 진행한 혐의(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 등)로 황선(41)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의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밝힌 이유입니다. 서울서부지법이 지난달 30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을 구속하면서 밝힌 이유도 비슷합니다. “사안이 중하고 사건 초기부터 혐의 사실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점에 비추어 필요성이 인정된다.” 지난해 9월 안상수 창원시장에게 계란을 던진 김성일 창원시의원도 “범죄의 중대성, 재범의 위험성 등이 고려돼” 구속됐습니다.
어느덧 익숙해졌지만 사실 범죄의 중대성, 재범 위험성이 구속의 ‘이유’로 등장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2008년 이전까지 구속의 ‘사유’는 오로지 세 가지 △주거가 일정하지 않다 △도주 우려가 있다 △증거 인멸 우려가 있다 였습니다.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까닭에 도주 우려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두 가지였습니다. 그리고 2015년인 지금도 구속의 ‘사유’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구속의 사유는 형사소송법에서 정하고 있습니다.
제70조(구속의 사유) ① 법원은 피고인(또는 피의자)이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피고인(피의자)을 구속할 수 있다. <개정 1995.12.29.>
1. 피고인(피의자)이 일정한 주거가 없는 때
2. 피고인(피의자)이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는 때
3. 피고인(피의자)이 도망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는 때
2007년 6월 형사소송법이 크게 개정되면서 70조에 다음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②법원은 제1항의 구속 사유를 심사함에 있어서 범죄의 중대성, 재범의 위험성, 피해자 및 중요 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 우려 등을 고려하여야 한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제 ‘이유’와 ‘사유’를 구별하실 수 있을 겁니다. 구속의 ‘사유’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구속을 결정하는 ‘고려 요소’로 범죄의 중대성, 재범의 위험성 등이 포함됐고 법원은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범죄의 중대성 등을 고려하면 구속의 사유가 인정된다”고 밝힙니다. 이 내용이 기사로 전달될 때, 기자는 “법원은 ‘…구속의 사유가 인정된다’고 구속 ‘이유’를 밝혔다”라고 적는 겁니다.
■ 구속의 ‘고려 요소’란 무엇인가?
대기업 회장이 수백억원대 회삿돈을 빼돌려 자기 뱃속을 채웠습니다. 검찰이 수사에 들어갔고 구속영장을 청구했습니다. 판사는 법률이 규정한 구속의 사유에 따라 구속 여부를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유명 대기업 회장이다 보니 도주의 우려는 사실 0%에 가깝습니다. 범죄 이후 시간이 흘렀고 수차례 압수수색으로 검찰이 기소에 필요한 증거는 대부분 확보했습니다. 따라서 증거 인멸 우려도 낮습니다. 판사는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가진 자들이 법 위에 군림한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사안의 중대성을 구속 사유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검찰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형사소송법 70조 2항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습니다. 2006년 2월 장윤석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은 △재범의 가능성이 있는 때 △피해자 및 중요 참고인에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을 때 △사형, 무기 또는 장기 10년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 만한 사유가 있을 때를 구속사유에 추가하자는 내용이 핵심이었습니다. 물론 장 의원 등의 개정안은 아래와 같은 이유의 반론에 직면했습니다.
“…‘사안의 중대성’이라는 사유만을 이유로 구속할 수 있다고 한다면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과 충돌할 우려가 있다. …이를 독자적인 구속 사유로 규정하는 것은 불구속재판·수사의 원칙에 역행할 우려가 있다. …특히 도망할 염려를 판단하는 하부 인자에 불과한 ‘사안의 중대성’이 독자적인 구속 사유로 추가되면, 피의자가 ‘사형, 무기 또는 장기 10년이 넘는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범죄를 범한’ 경우와 같이 일정한 범죄에 대하여는 도망의 염려가 있는지, 증거 인멸의 염려가 있는지 여부를 떠나 구속 사유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는 불합리한 결과가 초래될 우려가 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법원행정처 형사소송법 개정법률 해석)
장 의원의 개정안은 폐기됐지만 2006년 검찰과 법원의 극한 대립을 몰고온 ‘론스타 사건’이 등장했습니다. 검찰이 청구한 핵심 피의자들의 구속영장이 줄줄이 기각됐습니다. 당시 법원은 이례적으로 긴 분량의 보도자료를 내어 기각 사유를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 바로 가기: [전문] ‘론스타 영장’ 기각 사유 법원 보도자료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70345.html )
그 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장 의원의 개정안을 반영한 수정안을 발의했고 그 결과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구속 사유를 확대하지 않는 대신 범죄의 중대성, 재범 위험성, 피해자·중요 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 우려를 구속의 사유를 판단할 때 고려할 사항으로 규정한 겁니다.
법원과 검찰의 치열한 대립의 결과물로 탄생한 조항이라 그런지 이 조항을 설명하는 두 기관의 해석에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개정안에 대한 당시 법원과 법무부(검찰)의 설명입니다.
“실무상으로는 이미 범죄의 중대성 등을 고려하여 구속 사유를 판단해 왔으므로, 개정법의 시행으로 인한 근본적인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재범의 위험성”이나 “피해자·중요 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 우려”는 구속 사유를 판단하는 구체적이고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는데, 향후 개정법의 시행 과정에서 구속 실무에 어떻게 반영될 것인지 주목할 만하다.”(법원행정처 형사소송법 개정법률 해석)
“지금까지 수사·재판에서 구속 사유를 판단할 때 사안의 중대성이나 재범의 위험성 등을 고려해 오던 실무 관행을 형사소송법에 반영함으로써 선진 각국에서 인정하는 ‘예방적 구금’과 유사한 개념을 도입하고, 법 규정과 실무 사이의 괴리를 해소하여 구속 제도의 운영과 관련된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하였다.”(법무부 개정 형사소송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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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지난 12월 30일 밤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항공보안법 위반과 업무방해, 강요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돼 서울남부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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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문헌
<인신구속제도를 둘러싼 법 적용의 왜곡과 그 해결 방안> 신동운. 1998년
<영장 발부에 있어 구속 사유 판단의 문제-개정 형사소송법 제70조 제2항을 중심으로> 이승준. 2008년
<피고인의 구속 사유에 관한 고찰> 정진섭. 2008년.
<형사소송법 개정 법률 해석> 법원행정처. 2007년
<개정 형사소송법> 법무부. 2007년
<형사소송법 제70조 제2항 등 위헌소원> 헌법재판소 결정문 2009헌바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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