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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1.03 09:38 수정 : 2014.11.03 09:38

최진영 소설 <0> ⓒ이현경



최진영 소설 <0>



글을 못 쓰고 있다. 시간도 많고 쓰고 싶은 이야기도 있는데 도무지 문장으로 엮이지가 않는다. 내가 쓴 문장을 다시 읽어보면 죄다 거지발싸개 같고 밑도 끝도 없이 이대로 끝장이란 예감만 든다. 하여 이제부터 쓰게 될 이 글은, 글이 정말 써지지 않는 상태에서 뭐가 되든지 일단 한번 써보자는 작정으로 쓰는 글임을 미리 밝힌다. 이 글을 마칠 때쯤이면 ‘왜 쓰는가’보다 ‘왜 쓰지 못하는가’를 알…… 긴 개뿔 더 오리무중이겠지.

*

책이 사라졌다.

분명 이 방 어딘가에 있었는데 없어졌다. 책 제목은 The Earth, 아니 The other Earth…… Another Earth였나. 모르겠다. Earth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그 단어를 분명 봤다. 지난여름의 한복판에 얻은 책이다. 친밀한 사이가 될 수도 있었지만 겁이 많고 체념이 빠른 점이 서로 비슷해(이건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결국 친해지지 못하고, 어쩌다 우연히 만나면 의례적인 안부나 겨우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버린 그를(그는 애당초 나와 친해질 생각이 없었는지도) 합정역 4번 출구 근처에서 (또) 우연히 만난 날이었다. 반쯤 탄 담배를 윗니, 아랫니로 물고 있던 그는 한쪽 어깨에 삐딱하게 걸치고 있던 가방에서 그 책을 꺼내주며,

이걸 네가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고 우물우물 말했다. 그도 나도 찡그린 인상이었다. 빽빽한 여름 햇살에 갇혀 자욱하게 떠 있던 담배 연기 때문이었을까. 모르겠다. 더위에 지쳐서 그랬을 수도 있다. 길 한복판에 가방도 없이 서 있던 내게 두꺼운 책을 건네는 그가 조금 미웠다. 처리하기 곤란한 짐을 떠넘기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엉겁결에 받아만 두고 읽어보지 않았다. 아니다. 책을 해치우고 해가 기우는 방향으로 총총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책 뒷면에 짤막하게 적힌 본문을 조금 읽었다. ‘우주의 본질은 사이코패스에 가깝다. 우주는 생명 따위에 하등 관심이 없으며, 생명이 존재하는 행성, 예컨대 지구 같은 건 돌연변이에 불과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우주는 무자비하다.’ 그런 문장을 봤다. 처음 볼 때도 그랬고 이후에도 그 문장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팠다. 무섭기도 외롭기도 했다. 공통적으로 가슴 한복판이 저릿하고 무기력해졌다. 나의 경우, 굳이 한 문장을 써야 한다면 (우주의 무자비함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우주는 아름답다’고 쓰는 쪽이었다. 그때 생각했다. ‘무자비하고 아름답다’와 ‘무자비하지만 아름답다’와 ‘무자비하여 아름답다’의 차이에 대해. 무자비함과 아름다움의 관계와 그 단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다가,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두 단어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전을 찾아봤다. ‘무자비하다’는 ‘냉혹’과 ‘모질다’는 단어를, ‘아름답다’는 ‘균형’과 ‘조화’라는 단어를 품고 있었다. 안개에 뒤덮인 도시의 뒷골목처럼 모호하고 위험한 단어들……. 그러니 내게 우주는 어떤 형용사도 자신 있게 붙일 수 없는, 다만 ‘우주’였다. 우주가 그럴진대 모든 게 그러하지 않겠는가. 존재하는 모든 단어, 우주가 품고 있는 모든 존재와 감정과 사물이. 하지만 언어는 나의 유일한 연장. 그 연장이 불편하고 무서웠다. 그 책을 받을 즈음부터 그랬다.




최진영(소설가)



최진영

2006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팽이>가 당선되었다. 2010년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으로 제15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팽이》, 장편소설 《끝나지 않는 노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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