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 소설 <2화>
어딘가에 있다고 믿었기에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 책을,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드는 순간부터는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대개 그런 식으로 살아서, 참 많은 사람과 사랑과 신뢰를 잃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번에 잃어버린 건 사람이나 사랑이 아닌 책이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책장과 책상과 의자를 샅샅이 훑고 바닥에 오래 깔아둔 이불과 베개를 들춰 탁탁 털어봤다. 폐지를 모아두는 박스와 좁은 베란다를 꼼꼼히 뒤졌다. 싱크대 찬장과 냉장고를, 화장실 선반과 신발장을 열어보았다. 실소를 지으며 세탁기 속도 들여다보았다. 없었다. 어디에도 없었다. 책은 찾지도 못하고, 내 삶의 터전은 너무나 산만하고 지저분하다는 못마땅한 사실만을 새삼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니 어느 구멍엔가 처박혀 있어 영영 찾지 못할 것은 Earth가 들어간 책만이 아니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많은 것을 잃거나 잊어가며 살고 있는 게 분명한데…… 막상 그런 생각이 들자 확 귀찮아졌다. 잃은 것을 잃었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알게 되어 신경 쓰는 것이.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이. 잊거나 잃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산다면 참 좋을 텐데. 잊거나 잃는 순간 그것과 관련된 기억이나 감정도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면.
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숙제니까 써야 하는 일기가 아니라 누구라도 볼까 전전긍긍하여 베개 홑청 속에 쑤셔 넣었다가, 혹시라도 엄마가 그걸 발견할까 봐 책상 서랍 가장 깊숙한 곳으로 옮기고, 하지만 누구라도 가위나 풀 따위를 찾겠다고 서랍을 열어보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결국 팔절지 크기의 문제집을 반으로 접어 그 사이에 감추고서 가방에 넣고 다니던 노트. 그 노트에 ‘푸른색의 단파장들은 산란하여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고 붉은 계열의 장파장들이 우리의 눈에 도달하므로 노을은 붉고 노랗게 보인다’라는 문장이 있든, ‘태양의 진화가 끝날 때까지 지구가 남아 있다면 백색왜성이 된 태양과 함께 지구는 식어간다’라는 문장이 있든, ‘안경테를 하얀 투명에서 검정으로 바꿨다. 그래서 훨씬 선명하게 보이는 까만 눈동자를 자꾸 보다가 눈이 마주쳤고 나는 즉시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나는 네가 좋아, 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보고 있는 게 좋으니까 눈치 보지 않고 내내 쳐다보고 싶을 뿐인데 그러면 내가 좋아한다는 걸 눈치챌 테니 자꾸 본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고백이랑 전혀 다르지 않다. 고백하지 않고 좋아한다는 걸 들키지 않고 하루 종일 쳐다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투명인간이 되고 싶다’라는 문장이 있든, ‘수영이와 정혜가 등나무 밑에서 점심 먹자고 해서 지나에게 그 말을 전했는데 그걸 알고 수영이와 정혜가 체육관 옆 벤치로 장소를 바꾸고 지나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점심시간에 수영이와 정혜가 나를 보고 눈짓을 했다. 나는 도시락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고 지나를 잠깐 봤는데 지나는 거의 울 것 같았다. 나쁜 년이 된 것 같았는데 수영이와 정혜는 지나를 나쁜 년이라고 했다. 나는 수영이와 정혜가, 더 좁게 말하자면 수영이가 가장 나쁘다고 생각했고 제일 덜 나쁜 건 지나라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수영이와 정혜의 말이 사실이라면 수영이와 정혜와 나, 그리고 지나까지 다 나쁘지만 지나는 적어도 내게 그렇게 굴지 않는다’와 같은 문장이 있든, 아무도 노트에 적힌 내용을, 아니 노트 자체를 신경 쓰거나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저 누구라도 그것을 읽고 나의 비밀을, 비열함을, 합리화를, 혹은 상처나 원망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 그리고 또 몰랐다. 대체 왜 기록하는지를. 내게 있었던 일을 마음에 묻어두지 않고 굳이 글자로 옮기고, 그것을 남들이 볼까 두려워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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