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 소설 <4화>
동해 물과 백두산이.
재이의 입에서 급기야 그런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애국가를 어디서 들었을까 생각한다. 재이도 언젠가 애국가 1절을 다 외고야 말겠지.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럴 날이 온다. 붙일 말이 없어 억지로 이것저것 갖다 붙인 듯한 애국가 4절까지 다 외다가, 언젠가 가물가물할 날도. 재이는 벌써 동해 물과 백두산까지 안다. 그리고 재이는 자꾸 일어서려고 한다. 재이가 나보다 더 불편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의 발은 바닥에 닿아 몸을 안정적으로 지탱해주지만 재이의 발은 공중에 떠 있다. 그런 상태로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좁디좁은 이코노미 클래스에 앉아 있으려니 퍽 답답할 것이다. 때때로 일어서려고 꼬물거리는 재이를 눌러 앉히다 보니 비행기는 어느새 이륙하려는 중이다.
무더워.
비행기가 빠르게 달리자 재이는 눈을 꼭 감았다.
아이, 무더워.
털스웨터를 입고 무덥다 하는 꼴이 우스워 나는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재이야. 무덥다는 말뜻을 아니?
아니?
아빠 말 따라 하는 거야?
아니. 몰라.
나는 문득 깨닫는다. 무덥다, 습기 찬 더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재이는 무섭다고 말하는 중이다. 암담해진다. 재이는 여전히 두 눈을 꼭 감고 있다. 나는 재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떠나기 전 나는 진지하게 의사를 타진했다. 아빠랑 같이 여행 갈래? 여행의 의미를 알아듣도록 30분 동안이나 손짓 발짓을 섞어 설명했다. 재이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빠랑 놀러. 거기까지 말하고 재이는 손뼉을 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데 아빠가 놀아줄 수 있는 건 아니야. 아빠는 일을 해야 해. 재이를 데리고 갈 뿐, 재이와 놀아줄 수는 없어. 그래도 괜찮겠어?
나만 놀 거야.
재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재이가 뭐라고 하든 그 말을 믿어보고도 싶었다.
사실 여자의 말은 무시해도 좋았다. 나에게는 고시원이 있었다. 월세 15만 원짜리 방은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창문도 없는데 언제나 추웠고, 오래된 소변 냄새가 났지만 작업공간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대학 시절부터 카페니 도서관이니 독서실이니 전전하며 글을 써봤지만, 15만 원짜리 고시원만 한 곳이 없었다. 단연 집중력이 가장 높아지는 곳이었다. 그런 공간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까닭이 컸다. 고시원에 맛을 들이니 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항상 불편하게, 나쁘게, 소음을 견디며 글을 쓰는 버릇이 신체에 자리 잡은 것 같았다. 또한 나에게는 아직도 어머니가 있었다. 그다지 좋은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재이를 돌봐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여자의 배려 따위는 필요 없었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