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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05 09:24 수정 : 2014.12.05 09:24

박민정 소설 <5화>



여자는 그런 걸 배려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별달리 배려로 느껴지는 제안이 아니었다. 1,200매 분량의 원고를 작업해야 했고, 두 달이라는 기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로서도 그 이상의 시간을 들일 수는 없었다. 보따리를 이고 지고 여기저기 강의를 다니는 시간강사에게 긴 분량의 원고를 집중해서 작업할 수 있는 기간은 3개월이 고작이다. 학기 중에는 아무래도 어려운 것이다. 여자는 홀로 아이를 키우는 내 사정을 거듭 언급하며 제안했다. 남부 소도시에 있는 호텔에서 한 달간 작업하라고. 서비스니 시설이 나쁘지 않을 것이며, 창밖에는 바다가 보이니 작업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겠느냐고. 그 대목에 이르러 나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바다라니. 작업실에 처박혀서 나오는 글을 원하지 않는다니. 고작 자신의 자서전을 두고 그딴 식으로 말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어차피 글은 작업실에 처박혀야 나온다. 벽을 바라보며 한없이 앉아 있어야만 나온다. 월 15만 원짜리 쪽방 고시원에서든 오션 뷰 호텔 방에서든.

그러나. 그래도. 그렇지만. 하지만. 문득 이런 접속사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재이에게는 바다가 처음이다. 먼 길 여행도. 비행기도. 호텔 숙박도 전부 재이에게는 첫 경험이 될 것이다. 호텔 근처에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들도 많다고 했다. 여자는 아이가 지루해하지 않도록 디브이디와 동화책들도 선물할 것이며, 부식비도 넉넉하게 지원하겠다고 했다. 세 살 아이를 데리고 가는 여행이라, 걱정되는 점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돌연 기대감이 엄습했다. 재이와 함께 떠나는 여행. 호텔 방을 배경으로 재잘대는 재이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다. 어떤 말을 배우게 될지, 어떤 행동을 새로 하게 될지도 궁금했다.

간혹 작업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재이와 놀게 되더라도.

비행기가 도움닫기를 마치고 날아오르자 재이의 얼굴이 밝아진다.

이제는 안 무더워?

나는 재이의 말투를 따라 해보았다.

안 무더워.

털스웨터를 입은 재이는 환하게 웃는다. 통통한 팔목에서 팔찌가 반짝 빛난다. 어머니가 여행 기념으로 장만해준 미아방지용 팔찌다. 재이의 이름과 나의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 있다. 오래전 나도 그런 걸 걸고 다닌 적이 있다. 그거 없었으면 널 잃어버릴 뻔했어. 어머니는 가끔 그런 말을 했다. 그럴 때마다 잃어버리다, 그것이 나에 관한 표현이라는 게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재이를 갖게 된 후부터 어머니의 관용적 표현들 대부분이 이해되었다. 가졌다. 생겼다. 놀린다. 쥔다. 잃다. 사람에게 하는 표현이라기에는 어색하게 느껴졌던 그것들은 적확했다. 자식은 물건이나 마찬가지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귀한 물건이다. 어떤 사람도 이 물건보다 귀하지 않다.

아빠. 자도 돼?

굳이 허락을 받으려 하는 재이가 사랑스러워 꼭 껴안아주었다. 남부 소도시 근처의 공항에는 한 시간도 안 걸려 도착할 테지만, 나는 재이의 수면을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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