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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08 09:34 수정 : 2014.12.08 09:34

박민정 소설 <아름답고 착하게> ⓒ이현경



박민정 소설 <6화>



여자는 플래티넘 회원이었다. 재이와 나는 한 달간 숙박하기로 했다. 프런트의 직원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스튜어디스처럼 프런트 직원도 예뻤다. 이런 여자들을 볼 때는 습관적으로 두 가지에 주목한다. 귓바퀴 옆에 꽂혀 있는 가느다란 머리핀. 바른 듯 안 바른 듯 깔끔하게 발려 있는 누드 톤의 매니큐어. 단정한 차림 자체가 비즈니스의 일종인 여자들의 인상을 결정짓는 것들이다. 그런 여자들을 볼 일은 드물고, 이렇게 보게 되면 기분이 좋다. 그녀들은 항상 미소를 짓는다. 내 여자가 된 것처럼. 재이와 함께 있으니 그녀들은 더 많이 웃는다. 작은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귀여운 재이를 보면 누구든 웃지 않을 수 없으니까.

호텔의 하룻밤 가격은 20만 원에 육박했다. 할인율을 적용해보아도 꽤 비싼 밤들이다. 여행을 하며 이런 방에 묵어본 적도 없다. 내게 여행 자체가 낯선 것이었다. 대학 시절에도 여행을 다녀본 적이 거의 없었다. 배낭여행 같은 건 내 세대의 일반적인 취미가 아니었다. 어쩌다 가는 여행은 학과에서 단체로 떠나는 엠티 같은 것뿐이었는데, 멀리 떠나기만 할 뿐 자취방이나 강의실에서 벌어지던 술자리의 연속이었다. 숙소는 마치 심사숙고 골라낸 듯 최악이었다. 자취방이나 강의실에서, 그리고 야외에서도 서로의 몸에 몸을 쌓으며 잘만 자던 우리들이었지만 멀리 떠나와도 변함없다는 사실은 조금 슬펐다.

여자들과 다녔던 몇 번의 여행. 그것은 정말이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자들은 나와 여행을 다녀오기만 하면 이별을 제안했다. 여행은 사람의 욕망을 전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 평소에도 주전부리 잘하는 여자들은 여행을 떠나면 더욱 식탐이 많아져 시도 때도 없이 먹을 것을 찾았고, 나는 대체로 받아주지 않았다. 여자들은 대부분 많이 먹기도 했지만 거의 전부가 깨끗한 숙소를 원했다. 잠만 잘 수 있는 곳을 원하는 여자는 한 명도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나는 좀처럼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호텔 복도에서 풍기는 향기부터 대개의 모텔에서 풍기는 그것과 다르다는 걸 나는 인지했다. 평범한 머스크 향이었지만 이런 향을 풍기는 숙박업소를 본 적은 없었다. 어느 저녁 너른 거실 바닥에 가득 펼쳐놓은 마른빨래에서 날 듯한 기분 좋은 향이다. 시장통에 위치한 장급 모텔로 돌아가기란 힘들겠구나, 잠시 생각한다. 허름한 숙박업소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화한 락스 냄새와 달콤한 로션 향이 뒤섞인 듯한. 그런 곳에 들고 나면 머리카락이며 옷에 그 냄새가 밴 것 같았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어쩌다 3만 5,000원짜리 하룻밤을 보내게 되면 처지를 비관하게 될 것이다.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증거다.

벽에 걸린 그림들도 진짜 그림들이다. 모작이 아니란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갔던 모텔을 떠올려본다. 역세권에 있는 모텔이었다. 모텔 이름은 행복한 눈물. 1,000만 달러를 호가하는 리히텐슈타인의 그림 제목이다. 동행한 여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다. 설마 그건가? 리히텐슈타인 그림? 나도 설마 했지만 로비에 대문짝만하게 걸린 모작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행복한 눈물을 흘리는 그림 속 입 큰 여자처럼 그 여자의 입도 떡 벌어졌었다.

그리고 이제 여자들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여자들, 그리고 잘살아온 남자들이 양보할 수 없는 조건 같은 것들을. 누구나 좋은 것들을 겪고 나면 나쁜 것으로 쉬이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야 이미 알고 있다. 나쁜 것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져버린 것이다. 고작 냄새만으로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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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박민정의 <아름답고 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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