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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09 09:30 수정 : 2014.12.09 09:30

박민정 소설 <7화>



재이는 열쇠를 들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유광 코팅으로 반짝이는 분홍색 카드였으므로 재이가 탐낼 만했다. 생일 파티 초대장이라도 되는 양 재이는 신 나서 그것을 만지작거린다. 그러나 당연히 재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문을 열 수 없다. 버둥거리는 재이를 번쩍 들어 문을 열도록 도와주었다. 문이 열리자 재이는 신발을 벗으려 애쓴다. 패딩 부츠는 재이에게 난이도가 높은 신발이다. 신발을 벗는 걸 도와주려니 재이의 팔이 목에 감겨온다.

그때 나는 생각한다.

평범한 부모들을 두 부류로 나눠볼 수 있지 않을까. 일찍이 자식에게 좋은 것들만 겪게 하고 싶은 어떤 부모들. 나쁜 것들도 충분히 겪게 하고 싶은 다른 부모들. 전자라면 좋은 것들만 겪은 자녀가 설령 나쁜 것들을 겪게 되더라도 금방 좋은 것들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일 터였고, 후자라면 나쁜 것들도 겪어본 자녀가 설령 나쁜 것들을 겪게 되더라도 그 사실에 크게 불행을 느끼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 터였다. 사실 전부 나쁜 것들에 대한 불안이다. 나는 재이에게 어떤 부모가 되려 하는 중인가. 재이는 신을 벗고 발을 올려놓는다. 대리석 바닥에.

나는 경대에 녹취 정리서류와 여자의 포트폴리오를 포함한 참고자료들, 그리고 노트북을 부려놓는다. 짐을 정리한 후 재이의 옷을 갈아입히고 냉장고에 있던 과채 주스를 물려주었다. 재이는 자꾸 자신이 끌고 온 캐리어 위에 앉으려 한다. 나는 캐리어를 옷장 안에 넣어버리고 소파에 있던 빨간 쿠션에 재이를 앉혔다. 재이의 자리는 여기야. 재이는 쿠션에 앉아 말가니 나를 본다. 그 모습이 문득 멀리 간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 같아 보여서 가슴이 아프다. 노트북 부팅을 기다리며 재이에게 기린 귀 모양 머리띠를 씌워주고는 그 모습을 카메라로 찍었다. 남부 소도시에서의 첫 사진이었다. 재이는 통 유리창 앞에 앉아 있고, 브이를 그린 재이의 뒤에 바다가 보인다.

침구는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킹사이즈 침대에는 얄궂게도 환영의 말을 담은 카드가 놓여 있다. 헬로 미스터 리. 낯간지럽다. 엄밀하게는 헬로 미세스 허가 되어야 할 것이다. 허 교수, 그러니까 나를 이곳으로 보낸 여자의 돈으로 묵는 방이니. 자료들을 다시 정리하며 경대에 있는 어매니티를 확인한다. 스킨, 로션, 에센스, 크림, 전부 남성용이다. 당연히도 비닐 봉투에 담긴 일회용이다. 누구나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며, 나만을 위해 준비되었다는 뜻이다. 문득 챙겨온 재이의 물건들이 떠올랐다. 재이의 로션, 크림, 파우더 등. 나는 경대에 부려놓았던 작업용 짐들을 소파 테이블로 치웠다. 경대의 빈자리는 재이의 물건들로 채워졌다.

재이야. 아빠랑 오니까 좋아?

물어볼 시점이다.

배고파.

재이는 동문서답을 한다. 나는 배고프다며 시무룩한 재이가 그 옛날의 여자들과 흡사하게 여겨져 기가 막히고 우습다.

밥 먹으러 가자.

언제에?

기대감에 충만한 듯 재이는 말꼬리를 길게 뺀다. 나는 아빠 일 30분만 하고, 대답한다. 낮 동안 작업을 시작하긴 글러먹은 듯하다. 인터넷을 이용해서 처리해야 할 일만 후딱 해야겠다 싶다. 재이에게 밥을 먹이고, 장을 봐야 할 것 같다.

아빠 이것만 하고, 아빠 이것만 할게, 재이가 듣든 말든 나는 습관적으로 중얼거린다. 재이가 곁에 다가와 오래된 잡지를 집어 든다. 무거울 텐데, 생각하는 찰나. 제 XXⅦ권 제3호. 통권 제107호. 재이가 로마자를 유심히 본다. 그것을 읽어낼 수 있을 것처럼. 그래, 아이에게는 한글이나 로마자나 똑같이 해독 불가능한 문자다. 그러나 곧 재이는 로마자를 집어치우고 노래를 부른다.

문득 이런 환상을 본 듯하다. 재이가 로마자를 주목한다고 해도 내가 그 사실을 알아챌 방법은 없다. 아빠 이건 뭐야, 정확하게 손가락으로 짚어내면 몰라도. 재이는 어느새 잠들어 있다. 비행기에서의 수면이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재이가 언제 깨어날까 가늠한다. 아무래도 한 시간 이상 잘 것 같다. 작업을 시작하기도 뭣하고 안 하기도 뭣하다. 문득 황망해진다. 어미가 일 나가며 재워둔 아이가 갑자기 잠에서 깼을 때 느끼는 황망함 같은 것이다. 집은 어둡고 아무도 없다. 내게 분명하게 남은 원체험이다. 어머니는 가혹하게도 문을 단단히 걸어두고 외출하곤 했다. 내 힘으로는 절대 열 수 없도록. 문 열기를 포기하고 다시 어둑어둑한 집 안을 감당하다 보면 한구석에서 기린 같은 커다란 짐승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그런 기분이 든다. 그러나 어둑어둑한 집구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호텔 방은 아늑하다. 자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내 아이다. 재이가 깨어나서 황망함을 느낄 일은 없다. 아이에게는 내가 있으니까. 나에게는 아이가 있고. 내가 보는 환상은 커다란 짐승이 아니라 기린 머리띠를 쓰고 노래를 부르는 내 아이의 귀여운 모습이다. 재이는 머리띠를 쓴 채 잠들어 있다. 그것을 조심스레 빼내면서, 나는 재이의 곁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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