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 소설 <9화>
나는 아직도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넘어서지 못한다. 노트북을 밀어두고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는 재이를 바라본다. 다행히 재이는 주는 대로 잘 받아먹고 때가 되면 군말 없이 잠드는 아이다. 가장 놀라운 건 잠에서 깨어날 때였다. 내가 얼마나 잠투정이 심한 아이였는지는 나도 기억한다. 아이 입장에서는 잠이라는 전환을 지나 현실을 마주할 때의 황망함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재이는 단 한 번의 잠투정도 부리지 않았다. 잠에서 깨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긁으며 멍한 눈으로 앉아 있을 뿐이다. 하얀 내복 바람으로 그러고 앉아 있는데 토끼같이 귀엽다고 어머니는 재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도 얘 같기만 했더라면. 씨도둑 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안 닮았어. 어머니의 비난을 감수하며 나는 나의 단점을 온통 거스르고 태어난 듯한 재이를 한 번 더 안아주곤 했다.
재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어머니와 나는 단칸방에 살았다. 돈을 더 들여서 이사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침대에서, 어머니는 바닥에서 잤다.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나 작업실로 쓰는 고시원에서 보내는지라 집에서는 잠만 잘 뿐이었다. 방 두 개에 거실 딸린 집으로 이사 가기 위해서 얼마가 더 필요한지 가늠하지도 않았고, 어머니가 가진 재산이 얼마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재이가 태어난 후 우리에게는 돈이 자꾸 생겼다. 돈을 쓰다 보니 자꾸 생기는 것 같았다. 교통비가 없어 난감하던 옛날의 나는 없었다.
1970년대에 중학생이었던 여자, 허 교수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형제들은 모두 밥을 굶을 지경인데 내겐 파카 볼펜을 사다 주신 거야.
여자 생애의 내적 구조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손이 예뻐야 한다고 했던 부모님과 그런 부모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만들어갔던 여자. 결국 부모님이 원하는 결론을 맞았던 여자의 생애가 좀 더 확실히 그려진다. 나는 이 이야기의 내적 구조에 동의하기 시작한다. 타이핑에 속도가 붙고 지끈거리던 머리가 맑아진다. 생수 1.5리터를 비우자 만족할 만한 도입부가 완성되었다. 글이 잘 써질 때면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느낌이 유독 만족스럽다. 교사용 참고서에 쓰여 있는 설명을 베껴 판서를 할 때면, 내용은 무엇이든 좋았고 물 백묵의 부드러운 필기감만 손에 감겼다. 판서를 하는 동안 나의 글씨 쓰는 솜씨는 빠르게 향상됐다. 나는 자로 잰 듯 정확하게 판서한다. 철새는 새의 하의어고, 텃새의 반의어다. 비록 그걸 노트에 받아 적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다고 봐야 했지만. 우리들의 글쓰기 도구는 우리들 생각과 함께 작업한다. 왠지 좋아 오래전에 적어둔 니체의 말이다. 타자를 치면서 새 세상을 발견한 그가 감격에 겨워 한 말이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작업에 속도가 붙으면 더 많은 시간을 재이와 함께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욕심이 난다. 이왕 떠나온 김에 다양한 사진을 남겨주고 싶다. 재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본 사진 속 호텔의 모습이 촌스러워 보일지라도, 그런 추억을 선물하고 싶다. 와, 이 시절에는 고급 호텔이랍시고 이런 인테리어를 했구나. 성인이 된 재이가 친구들과 함께 그런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머릿속이 온통 그런 상상으로만 가득해 기분이 좋다. 손은 점점 더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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